본편 3 / 과거 1-2 : 보름달이 뜨는 , 그대 보러 와요

 

 

 

 

 그는 여전했다. 웃는 얼굴, 다정한 낯빛. 무언가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사는 여전히 다정했고 말 한 마디 없이 떠났던 것에 대해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돌아와주어서 고맙다는 얼굴, 조심스레 다가오는 손길에 고맙기에 앞서 그의 진짜 감정을 알 수 없어 두려워졌다. 조금의 두려움조차도 엄청난 어둠처럼 자신을 감싼다. 어쩌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조그만 생각에도 그녀를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사사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상냥함과 예전의 그 감정을 되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주고 싶었지만 받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확신이 들지 않는 상대에게 부담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의 태도라고 여겼다. 하지만 뜯어고칠 생각은 없어 그대로 놔둔다. 한 번 입을 열면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를 흔들고 싶지 않았다. 감정에 흔들려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 혼자면 된다.

 그러니…… 비록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이 말을 외우는 것은 그녀에게 주문이 되었다. 비록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괜찮다는, 꿋꿋함을 가장한 슬픔. 감정이 회오리치고 자신을 짓눌렀다.

 

“송하 씨는 마음이 많이 아픈 상태입니다. 이 명칭은 많이 들어보셨을 거에요. 우울증, 송하 씨는 우울증입니다.”

 

 엄숙하게 내리는 선고에 그녀는 칼에라도 찔린 듯 있을 리 없는 통증을 느꼈다.

 

“사실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흔한 병입니다. 괜찮아요, 송하 씨가 이상해서 걸린 병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음이 아플 수 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송하 씨만 괜찮으시다면 상담 치료를 진행하는 것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오셔서 한 시간 반 정도 송하 씨와 제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어때요, 어렵지 않죠?”
“저, 저는…… 글쎄요.”

 

 아까까지만 해도 무심해 보이던 눈길이 어느새 환자를 보는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사람 앞에서 자신은 환자로 취급된다는 것을 깨닫자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애인 분도 송하 씨가 아프지 않길 바랄 거에요.”

 

 사사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사를 생각했다. 큰 날개를 움츠린 채 곁에 앉은 사람과 닿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와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머릿속에 퍼진다. 아프지 않으면, 그래서 사사에게 기대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면 차근차근 다가가봐도 괜찮지 않을까.

 

“……노력해보겠습니다.”

 

 그가 활짝 웃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상담에 응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올 때마다 불안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까만 눈동자로 저를 쳐다보며 괜찮아, 송하, 하고 웃는 얼굴. 곁에서 얌전히 있는 하얀 손을 잡고 싶어 손을 뻗다가 슬그머니 숨겼다. 송하 씨, 들어오세요, 하고 이름이 불리자 그녀는 내키지 않았지만 일어섰다. 상담은 그 어떤 임무보다 힘들었다. 항상 감정과 생각을 숨기며 임무를 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다 말하라는 요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사가 송하를 보며 눈을 마주쳤다. 다녀와, 하고 손을 흔드는 모습. 송하는 그런 사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불안하지만 상담사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얼마든지 편히 앉으시라고 상담사가 권했지만 뻣뻣한 자세를 유지한 채 이것이 편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정말 그녀는 그런 자세가 편했다. 쉽게 풀어져 흐물거리는 자세는 불편할 뿐더러 몸에 도움도 되지 않는다. 흐트러진 것은 모두 나쁘다.

 

“마음은 누구나 아플 수 있어요. 다만 아픈 것의 이유를 찾으려면 원인을 살펴봐야 되겠죠? 송하 씨의 기억을 되짚어볼 겁니다. 일 년 전에 무엇을 하셨는지 함께 생각해볼까요?”
“일 년 전…….”

 

 기억이 새하얀 도화지 위에 새겨진 그림이라면 먹물이 그 위를 뒤덮은 듯한 기분이었다. 먹물을 잔뜩 묻힌 채 어리둥절해있는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무슨 일이 발단이 되어서 모든 의욕을 잃고 주저앉아 있다고 추측해보지만 추측조차도 힘들 정도로 기운이 빠져 있다. 사실은 이대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지만 역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마지막 남은 기운을 힘겹게 끌어올려볼 뿐이다.

 

“송하도 메두사나 오르카처럼 고양이는 별로야?”
“집에 있으니까 책임져야 할 생명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가늘게 뜬 노란 눈, 햇살에 반짝이는 흰 머리카락, 그 자체가 고양이일 것이다.

 

“기억하시는데 어려움은 없으신 걸 보니, 이때가 송하 씨에게 그렇게 나빴던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다른 날을 살펴볼게요.”

 

 상담사가 기억해내길 요구하는 시간은 점점 현재로 가까워진다. 그녀 자신 속의 건강하고 흔들림 없던 모습은 천천히 흐트러져 지금의 모습과 비슷해지고 있었다. 점점 감정에 휘둘리고 불안해하는, 상담사가 보고 있는 환자의 모습. 기억도 드문드문, 구멍이 뚫리는 부분이 많아지고 상담사의 질문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라는 대답을 반복할 무렵 그녀의 기억은 꽉 막히고 마는 부분에 도달한다. 이때다, 싶어 상담사가 몸을 내민다.

 

 그날은 날이 유독 따뜻했던 가을이었다. 유독 새파란 하늘 아래 아무 겁 없이 길을 걷고 있었고, 걸었는데, 걷다가, 걷고 나서…….

 

“……그때 당신은 누군가를 만났나요?”

 

 움찔, 치솟는 송하의 어깨를 보며 상담사는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초록색 파도 같다고 여겼다. 그녀는 입을 꽉 다물었다. 꽉 다문 입과 함께 급하게 흔들리는 고개. 상담사가 그 뜻을 알아차릴 때쯤에 그녀는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난다. 드르륵, 하고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저, 저는…… 그만두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이건 그만두겠습니다.”
“네? 송하 씨, 잠깐……. 나가시면 안 돼요!”

 

 잡기도 전에 그녀는 방문을 찾아 나가버렸다. 한 사람이 나간 방이 고요해졌다. 그 고요함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상담사가 그녀를 쫓아 방을 나왔다. 그녀는 상담을 진행하기 싫다고 소리를 지르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를 항상 함께 다니는 남자가 진정시켜주었다. 다소 말이 없었지만 그는 침착하게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아예 병원을 나서는 그녀를 급하게 따라나간다. 그는 마치 그녀의 안정제 같다고 생각하며 상담사가 갑작스럽게 비어버린 상담 시간을 홀로 보냈다. 어쩌면 그는 그녀를 안정을 취하게 만들고 당당한 모습으로 변하게 할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약을 받았다. 이것은 수면제고, 이것이 항우울제라며 짚어준 알약들은 색이 전부 흰색에 가까워서 뭐가 뭔지 구분을 하려고 해도 힘들다. 어차피 요즘에는 무엇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약의 색들을 익히는 것도 어차피 할 수 없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집에 돌아와 약들을 쳐다보다 오늘 먹어야 할 부분을 뜯었다. 다시 쳐다보며 분간을 해보려는 시도를 했지만 역시나 결과는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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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웅은 싫어 사사GS송하 - 바람결에 꽃내음처럼

 

 

 

 

 

 

 

 

 

바람결에 꽃내음처럼

 

2부: 너는 비처럼 쏟아졌다

 

 

 

 

 

 

 

 

 

 

“있잖아요, 만약 제가 죽고 싶어지면…….”


 만약 제가 죽고 싶어지면. 그녀의 말이 기억 속의 수면 위로 떠오르자, 문득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송하, 왜 그런 말을 해……. 자신은 그렇게 대답했었다. 그녀가 죽고 싶다고 말을 했는데, 그렇게 어려운 말을 꺼냈는데. 자신은 그저 그렇게 대답하기만 했다.

 

“있잖아요. 만약 제가 죽고 싶어지면……. 그렇게 되기 전에는 사사에게 꼭 얘기해주겠습니다. 제가 왜 이러는지에 대해서요.”


 가끔씩 밤중에 사사를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어째서 누구 손이 닿으면 놀라고 마는지, 전부 얘기하겠습니다. 하지만 죽고 싶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제가 잊어버릴 수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잊어? 뭐를?


“모든 것을요.”


 잊어야 할 모든 것에 자신이 들어가나 싶어 불안했다. 꼭 쥔 손을 토닥이며 송하가 웃었다. 이전에는 결코 보여주지 않던 웃음이었다. 어딘가 마음 한쪽을 놓아버린 듯한 웃음. 끌어안지 못해 무언가를 버린 얼굴이었다. 사사는 그 앞에서 울고 싶었다.


“물론 사사는 예외입니다. 단지 그곳을…… 그곳에 있었을 때, 그 일을…….”


……송하는 단서를 남겼구나. 송하는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보다 생각으로 꽁꽁 감춰두는 것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했던 말들을 최대한 더듬어봐도 이렇다 할 단어들이 걸려들지 않았다. 그녀가 써놓았던 글은 어떨까. 과연 그런 것이 남아 있을까? 그녀가 썼던 글들…… 노트. 꽃무늬가 그려진 노트, 자신이 골라주고 그녀가 글을 썼던 노트가 생각났다. 그것은 지금 어디에 있지? 사사는 황급히 일어섰다. 방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송하의 물건들이 담긴 상자를 몇 개 꺼내 들었다. 그녀가 죽은 후 아무것도 버릴 수가 없는 마음에 무작정 모든 것을 기숙사 방으로 가져가 모아두었다. 대충 상자에 담아 모아놓은 송하의 물건들. 그 상자들은 몇 개나 되었다. 물건은 많은데, 물건의 주인은 어디로 가고 없다. 상자를 하나 집어 안의 물건들을 꺼내 들었다. 머리 빗, 메모지, 하얀 봉투. 여러 권의 책들.


 상자를 수도 없이 헤쳐본 끝에 그는 그것을 찾아낸다.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노트를 살며시 펼쳐보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떨리기까지 했다. 마침내 정갈한 글씨가 적힌 노트를 펼쳤을 때 한 페이지에 한두 개의 문장, 혹은 몇 개의 단어만이 적혀 있다는 것을 알자 허무하기만 했다. 그녀는 노트 하나에조차 마음을 온전히 열어두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밖에 되지 않았다. 그 안에는 자신의 이름이 가득했다. 끊임없이 적힌 이름에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저를 간절히 찾았을 것을, 한 번이라도 제 이름을 불러줬다면 금세 다가갔을 텐데. 아니, 이름을 부를 힘조차 없었나 보다. 그걸 알아채고 달려가야 했는데. 어디에도 제대로 된 이유는 보이지 않고, 수없이 불러대는 이름에 마음만 아팠다. 찾아야 할 것은 노트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인지도 모른다. 노트를 몇 장 훑어본 후 노트를 덮으며 눈물을 닦은 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송하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적혀 있는 뭔가를 찾아야 했다.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흐트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송하의 물건에 손을 대기도 전에 그녀에게서 나던 향기가 방을 채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향기의 주인은 소리없이 사라졌는데, 주인을 잃고 남겨진 향기는 이렇게나 강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내내 요동 치는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네가 없는 세상은 아주 가끔은 살 만하고,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살 만하지 않은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며 네가 죽은 이유를 찾아내려 노력하는 나는 여전히 노력이 부족하다. ……따라 죽을 용기가 없으면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녀는 밤중에 기숙사 방문을 두드리는 일도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 사사의 기숙사까지는 아무리 빨리 뛰어봐야 15분 정도 걸린다.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그녀는 몇 번이고 뛰어와 문을 두드렸다. 품에 당겨 안으면 무언가에 놀랐는지 뜀박질을 하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날은 기숙사 침대에 재우며 몸을 토닥여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미약하게나마 안정된 얼굴로 늦잠을 자고 있어서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고 출근을 하러 나가고는 했다. 이따가 나 퇴근하고 나서 맛있는 거 먹자, 내 방에서 조금만 기다려줘, 하고 출근 중에 문자를 보내면 그녀는 답이 없었다. 퇴근 후에 집에 돌아오면 역시나 그녀는 단정하게 정리해놓은 침대를 남겨놓고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긴장을 풀고 멍하니 앉아 있는가 하면 어깨를 두드리는 손짓 하나에 소스라치게 놀라 겁먹은 얼굴을 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생각해보면, 생각해보면……. 얘가 왜 이럴까 싶은 일이야 있었지만, 깊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동안의 스파이 일이 힘들어서 긴장했던 것이 풀렸나 싶었을 뿐. 그래도 그녀의 곁에는 항상 자신이 있고, 뭔가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며 졸라대면 송하는 웃었고, 놀란 얼굴을 하다가도 자신인 것을 알아차리면 긴장을 풀었고. 아, 그래서였나 보다. 그녀가 보여주는 반응에 혼자 안심해 송하를 돌아보지 못했다. 자신이 그런 행동을 보였던 탓에 이제는 그녀가 또 곁에 없다. 사실 곁에 송하가 없다는 건 익숙한데, 아니, 익숙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일을 하다가 문득 힘이 쭉 빠졌다. 배도 고프지 않아 나가와 혜나더러 먼저 밥을 먹고 오라고 한 뒤 가장 가까운 휴게실을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앉아 송하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다가 곁에 누군가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곁에 앉는 몸짓이 익숙해 쳐다보니 비비안이 앉아 있었다. 팩에 든 사과주스, 혹은 파인애플 주스, 그는 그런 것을 들고 쭈욱 빨아 마시며 사사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응? 하고 되물으니 그는 친절하게도 말을 반복해준다.


“이제 기운 좀 차려야지.”


 기운을 차려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비비안은 묘한 대답을 해주었다. 너는 그래야 해. 왜냐하면…….


“너는 송하가 가장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니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송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저 단순히 친구를 남겨두고 떠났던 것에 대해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송하는 맺은 관계에 책임을 다 하려고 하는, 그만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책임감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을 뿐이다. 의무감으로 지속되는 관계에 혼자서만 사랑하는 것은 슬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정이 없던 송하에게 제가 가진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옳지 않다. 아무리 그녀가 자신을 많이 필요로 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사랑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도움과 사랑은 명백히 다른 범주에 속한 단어들이다. 그녀가 제게 가진 감정은 의지되는 사람인 것이지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가끔 먼저 전화를 해 저를 부르곤 했다. 통화의 내용은 무엇이 먹고 싶다, 어디를 가고 싶다, 그런 류의 내용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집에만 있던 그녀가 제안을 한 것이 기뻐 일을 빨리 끝내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함께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지 않겠습니까?
“응!”


 집에 가는 길에 사올게, 무슨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하고 물으니 먹은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무슨 맛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그녀는 뜸을 들였다. 사사가 먹기에 맛있었던 것으로 사오십시오, 라고 해서 초콜릿, 딸기, 샤베트 등등 여러 가지 맛을 고르게 되었다. 신이 나서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집에 가면 그녀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던 몇 시간 전과는 달리 반가운 얼굴이 아니었다.


“아……. 이제는 별로 먹고 싶지 않아서요. 미안합니다.”


 그래도 사온 아이스크림을 입에 떠서 넣어 주면 먹기는 했다. 먹는 것은 세 숟갈 이상은 되지 않았다. 조금 더 먹어보라고 입에 숟가락을 대면 거부하는 고갯짓이 보여 제가 다 먹어 치우고는 했다. 송하의 양을 가늠한 사사는 다음부터는 아이스크림을 최대한 크게 떠서 입에 넣어주었다. 송하, 너무 조금 먹잖아. 주걱으로라도 먹여줘야 되나? 하고 장난스럽게 하는 말을 들은 송하는 으레 정색을 하며 제 입이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하고는 눈을 흘겼다. 하지만 송하는 딱 세 숟가락만 먹잖아! 하니 다음에는 그보다 많이 먹겠습니다, 했다. 그래도 먹는 양은 언제나 비슷했다.


 그녀가 돌아온 후 그는 자주 행복했다. 퇴근하면 송하를 볼 수 있다, 출근하면서 전화를 하면 매번은 아니더라도 그녀가 전화를 받아주었다. 쉬는 시간에는 그녀에게 문자를 할 수 있고 가끔은 그녀가 먼저 전화를 해준다. 그녀가 제게 끼치는 몇몇 걱정거리들만 빼면 그는 행복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만큼 행복했는지는 알 수 없었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는 죽었으니 아마도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 자신은 그녀 덕분에 행복했는데 그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숨이 막혀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떠난 후로 자신은 매일 이런 아픔에 시달린다.


 더 이상 그녀를 찾아갈 일도, 같이 영화를 볼 일도 없어 일찍 퇴근한 날이나 금요일 밤이 되어도, 혹은 주말이 찾아와도 그는 희망에 젖지 않았다. 최신 영화가 뭐가 나왔나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고르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퇴근을 하고 나면 침대에 누워 그녀 생각을 하는 일이 남은 하루를 보내는 일이 되었다. 대부분은 그녀는 왜 죽어야 했을까, 라고 생각했고 어떤 때는 일어나 그녀의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재미있고 즐거운 것, 그것은 모두 송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지금은 의미가 없다. 그러고 보니 송하는…… 죽을 때 많이 아팠을까? 너무 많이 아파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겪었던 고통은 어떤 종류의 것이어도 슬펐다. 단 한 번도 아프지 않고 저와 있어주었으면 했는데 그녀는 끝까지 아파하며 죽었다. 송하가 죽었다는 소식, 제가 누구에게서 그 소식을 들었는지는 흐릿했지만 비비안 외에는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비비안을 찾는다. 그는 마침 스푼 건물 밖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송하가 죽었던 날을 정확하게 얘기해달라고? 나보다야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비비안은 노란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며 사사를 보았다.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평소와 달라 사사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두려워졌다.


 “너 그 앞에 한참 서 있었잖아. 그…… 죽은 송하 앞에서.”

 

……아, 생각났다. 그녀의 죽은 모습.


 

 일 때문에 꼼짝할 수 없는 날이었고 간신히 집에 돌아오자마자 거의 쓰러지는 수준으로 침대에 엎드렸다. 퇴근 후 꺼내본 휴대폰은 조용했다. 혹시 그녀가 전화를 다시 걸어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나 헛된 희망이었다. 몸은 피곤하고 잠이 오지 않았던 수많은 시간들. 그날따라 왠지 기분이 이상해서 밤중에 내내 침대에 엎드려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심장이 미칠 듯 뛰었다. 갑자기 송하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져서 그녀의 집으로 갈 뻔 했지만 그랬다가 송하가 놀랄까 봐 그러지 못했다. 불안해진 마음을 다잡고 간신히 잠을 자고 출근 준비를 했는데 또다시 드는 심장이 철렁한 기분에 결국은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아직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더욱 불안해져 혀만 치아로 물어뜯을 기세로 눌러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잘못 본 줄로 알았다. 그녀는 목을 맨 채 매달려 있었다. 어떻게 끈을 풀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송하가 팔에 안겼을 때의 무게만을 기억하고 있다. 창문에 달려 있던 커튼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듯, 송하를 지탱하고 있던 끈이 끊어지자 서늘한 몸이 두 팔에 쏟아졌다. 그토록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를 거부하던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순순히 그에게 안긴 순간이었다. 눈물이 나오기에 앞서 제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어 사사가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자 하얀 숨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그녀는 죽었다.


 늘 불 같았던 몸은 차가워져 있었다. 불을 끝내 삼키고 죽었는지 온기 하나 없다. 눈물과 숨이 섞인 채 숨을 쉴 때마다 눈물도 따라서 흘러내렸다.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났음을 알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가나 혹은 다나가 전화를 했는지 휴대폰이 쉴 틈 없이 진동했지만 하나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몸에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녀의 얼음장 같은 체온과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등, 모조리 그녀의 것들만이 현실 같았다. 나만 두고 사라짐에 대한 원망보다도 혼자 맞은 죽음의 아픔이 짐작이 되지 않아 서러웠다. 목에 남은 자국을 더듬다가 멍이 든 것을 보고 눈물이 뚝뚝 쏟아졌다. 송하, 너는 어디가 그렇게 아파서 갔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팠던 것이 대체 뭐였길래 나를 두고 가야 했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다기보다도 엄청난 소리를 내며 뜯어진다. 화가 잔뜩 났는지 평소보다도 무섭게 빛나는 눈.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가 휘날렸다.


“너 이 자식, 너 여기에 있는 거 다 알……!”


 말을 하다 말고 다나가 탄식했다. 뒤따라 들어온 귀능도 마찬가지로 입을 벌린 채 다물 줄 몰랐다.


 어떻게든 장례를 치른 후 송하의 집을 처분하는 문제가 생겼다. 그녀는 제 곁에 돌아왔던 짧은 시간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안 사사는 더 나올 것도 없을 것 같은 눈물을 짜냈다. 냉장고에는 제가 사다 놓았던 생수며, 우유며, 인스턴트 식품들이 가득했다. 이제 겨울이니 과일도 먹어야지! 하고 가득 사온 귤을 보며 송하는 난감한 듯 웃었다. 이걸 제가 어떻게 다 먹습니까. 너무 많습니다. 듬직하게 제 자신을 가리켜 보이며, 내가 자주 와서 먹을게! 하고 대답했다. 몇 번 들어가보지 않은 송하의 방은 애초부터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고요해 과연 그녀가 이곳에 살기는 했었나,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나이프로 건너간 그녀가 보고 싶은 나머지 환상을 봤던 것은 아닐까? 그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저는 아직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랬으면, 하고 바랬다. 평생 돌아와주지 않아도 좋으니 어딘가에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나를 보러 오지 않아도 괜찮아, 다른 사람과 사이가 좋아져도 좋아. 죽지만 않았으면 뭐든지 괜찮아.


 귀능과 다나는 송하의 집에서 주저앉아 있는 사사를 찾아와 붙들었다. 다나는 집안을 휘휘 둘러본 후 귀능과 사사 곁으로 돌아왔다. 야, 야, 들어봐라. 하더니 집안 정리며 기타 자질구레한 문제들은 네가 원한다면 스푼 내에서 처리해줄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 원래 이런 것은 안 되지만 귀능이 사사 군이 너무 불쌍해요, 우리가 뭐 좀 해줘요! 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


“어떡할래? 스푼에서 전부 처리해주길 바라냐?”
“그래요, 사사 군. 우리가 해준다니까요?”
“아, 아니요…….”


 물건들은 제가 전부 갖고 갈게요. 송하 것이니까요. 그렇게 다섯 번도 넘게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했다. 송하의 물건인데 함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수 없다며 극구 사양을 했다. 나가며 비비안이 물건 옮기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제안을 해도 끝까지 자신이 하고 싶다고 했다. 모든 물건을 기숙사로 옮긴 후 그는 내리 일주일을 끙끙 앓았다. 송하에 대한 상실감 때문인지, 그녀의 마지막을 목격했다는 충격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짚이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아팠고 격렬한 슬픔에 그는 꿈에서도 울었다. 아픈 것이 전부 나아도 이상하게도 그는 가끔씩, 여전히 아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루의 반인 까만 밤을 울다 보냈고 낮에는 괜찮은 척 행동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송하의 죽음을 잊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죽음을 제가 보았다는 것, 그녀의 목에 감긴 줄을 풀었던 것, 그 모든 것을 잊었다.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도 벅찼다. 그 이상의 아픔을 기억하기에 그는 지금 많은 부분에서 약해져 있었다.


 아니야, 비비안, 네가 틀렸어. 사사가 고개를 저었다. 비비안이 말했던 것처럼 송하가 나를 많이 사랑했다면, 이렇게 나를 혼자 남겨두고 죽을 리는 없다. 송하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이렇게나 확실한데. 그러니 송하는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틀림 없다.


 송하는 웃는 모습도 예뻤다. 일상 속 대부분은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쩌다가 표정이 풀어지며 흰 치아가 살짝 벌어진 입 안으로 언뜻 보이는 날이면 그날은 세상 전부를 누가 제게 준 듯이 행복해졌다. 그 웃는 모습을 보려고 별 짓을 다 하게 되었다. 그녀는 병원에 가서 마음이 아프다는 진단을 받은 후 웃는 표정을 짓는 일이 줄어 들었다.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먹은 후 피곤하다며 입을 다물었고 열심히 잠만 잤다. 집에 놀러 가도 자는 얼굴을 보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그것마저도 좋았다. 꿈에서도 저와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깰 때까지 기다렸다. 지금도 그녀는 집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하는 적이 있었다. 자고 있어서 전화를 받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찾아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거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송하의 예전 집 앞을 서성이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갈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히 비밀번호를 눌러도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 안에 더 이상 그녀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까 봐 무서워서 서둘러 기숙사로 돌아왔다.


 휴일이 오면 그 동안 송하와 있었던 일들이 저를 덮쳐 괴로웠다. 침대에 엎드려 잤다가 깨면 어느새 주말이 지나가고 월요일이 되어 있겠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사사가 일어섰다.


“나야. 문 열어.”


 비비안이 서 있어서 사사는 그가 반가웠다. 뭐가 들어 있는지 까만 봉투를 들고 있다. 그 안에서 꺼내 드는 것을 보니 비닐로 포장된 과일이었다. 마트에 가기도 귀찮아서 카페에서 사왔다고 했다. 받아 든 바나나는 노랗다.


“약은 잘 챙겨먹고 있는 거야?”
“응. 너도?”


 조심스럽게 하는 말에 비비안이 사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세심하고 신사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비비안이 작게나마 눈살을 찌푸리던 순간이었다. 비비안이 그의 약통을 들었다 놓으며 만지작거렸다.


“이건 네 약이잖아. 내가 먹을 수는 없지.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모든 스푼 사원들에게 내려진 처방이라고?”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사사의 되물음에 비비안이 고개를 저었다. 송하가 죽고 나서 네가 받은 약들이잖아. 상담을 안 하겠다, 안 하겠다, 버티고 버티던 너를 병원으로 데려간 것이 누군데. 귀능 씨와 서장님이었잖아.


“너는 우울증이고, 송하와 똑같은 병명이고.”


 SSRI, NDRI,SNRI. 우울증에 쓰이는 치료제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사의 눈이 커졌다. 스푼에서 처방한 약이라느니, 서장님이 먹으라고 했다느니, 모든 것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가짜 기억들인 것이다. 나는 아팠다. 송하의 죽음을 가장 먼저 발견해 받은 충격으로 인한 결과였다. 모든 것이 기억났다. 희미하던 기억들이 점차 선명해진다. 죽어도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혼자서 참아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어이 끌어낸 것이 귀능과 다나였다.


“너 그러다 죽…….”
“서장님! ”


 귀능이 말렸고 다나가 입을 다문다. 질질 끌고가 이 자식 좀 약 좀 처방해주시고 안 죽게 해주시면 됩니다, 하고 말을 던졌다. 상담사는 쩔쩔맸고 귀능이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저희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스푼이라는 히어로 기관 소속인데 저희 소속 사원이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치료를 좀 해주시면, 아, 저희 신분증도 보여드릴 수 있어요. ……서장님! 신분증 좀 보여주세요!


“……그럴 수 있어요. 큰 충격으로 인해 그렇다고 봐야 할 겁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혼자 병원을 찾아가보았지만, 법적인 관계의 보호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담자의 상담 내용을 알려줄 수는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래도 몇 가지 주의사항이라도 알려달라고 하자 지나치게 내용을 빽빽하게 쓴 점, 어느 부분은 간단하게 썼지만 또 다른 부분은 이상할 정도로 강조해가며 쓴 점 등을 들어가며 차근차근 예를 들어주었다.


 아무래도 자세하게 쓰면 쓸수록 좋죠. 내담자의 상태를 파악하기에 도움이 되니까요. 그런데 문장을 쓰는데 굳이 불필요한 수식어를 몇 개씩 넣어가면서 썼다는 것은 감정적인 부분에서 뭔가 후유증이 남아 있다고 봐야 할 거고요. 또 어떤 부분은 정말 단순하게 썼죠. 이 부분에서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담자 분의 속마음일 수도 있고요, 실제 겪었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상담 내용은 내담자가 아닌 다른 이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이것들은 사실은 자신의 상담 내용이었었다. 송하의 상담 내용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전부 자신에게 내려진 의학적인 소견이었다. 송하와 있었던 기억과 혼자 남은 후의 기억이 섞이고 또 섞여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되었다. 아, 송하. 너는 이렇게 깊게 나를 할퀴고 갔구나. 모든 것을 네게 맞추어 생각하게 될 만큼, 이렇게나 깊게. 내게 과거를 남겨두고 너는 어디로 갔는지.

 

 

 

 

 

 

 

 

 

 

Posted by 렐타
,

이런 영웅은 싫어 사사GS송하 - 바람결에 꽃내음처럼

 

 

 

 

 

 

 

 

 

바람결에 꽃내음처럼

 

1부: 네가 오니 눈물이 그쳤지

 

 

 

 

 

 

 

 

 

 

 스푼에서 옷을 간소하나마 깨끗한 걸로 주겠다는 것을 송하는 퇴직금만으로도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스푼에 붙잡혀올 때부터 입고 있었던 랩 스커트 형식의 옷이 반쯤 찢긴 채 종아리 근처에서 찰랑거렸다. 사사는 그제서야 송하가 신고 있는 구두가 다소 높은, 금방이라도 굽이 나갈 것 같은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송하, 하고 부르자 송하가 그를 쳐다보았다. 원체 180정도의 키에 높은 구두까지 신어 눈높이가 맞을까 말까 한 상태였다. 한층 가까워진 눈동자에 홀린 듯이 쳐다보며 잠깐 밥도 먹고, 음, 신발도 사고 그러는 건 어때? 하고 묻자 송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조금이나마 편한 신발을 신게 해주고 싶었다. 맛있는 밥도 먹여주고 싶었고, 보다 활동하기에 용이한 옷도 하나쯤 사주고, 사사에게는 많은 할 일이 있었다.

 

 신발과 옷을 산 것까지는 좋았는데, 식당에 들어서자 어쩐 일인지 송하는 입맛이 뚝 떨어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밥이 나오기 전에도 영 식욕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더니 밥이 나와서도 똑같은 상태였다. 갓 나온 음식은 틀림없이 먹음직스러운데도.

 

“어디 아파?”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지? 걱정스런 물음에 송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사는 상냥했지만, 그 상냥함에 취해 모든 것을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가 아픈 것이냐는 질문 하나에도 저렇게 걱정이 담긴 얼굴인데. 고개 숙여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입에 들어간 음식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혓바닥이 매끄럽지 못하고 까칠한 느낌이 드는 것이 혓바늘이라도 돋았나 싶기만 하다. 음식을 몇 숟가락 떠보지도 못하고 테이블에 소리 없이 숟가락을 놓아버렸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먹어보는 바깥음식이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지금 입맛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일이 지나도 상태는 똑같았다. 밥을 먹었느냐고 물어보면 입맛이 없어 물 한 잔으로 대신했습니다, 라는 대답이 여러 번 들려오자 사사 입장에서는 여간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송하도 그것을 알았기에 어떻게든 뭔가를 먹어보려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생활이 급격하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물 한잔이 선식 한 잔으로, 혹은 과일 몇 조각쯤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더군다나 아무도 없이 혼자서 사는 송하를 끼니를 챙겨주겠다고 매일 붙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는 사사는 제 밥벌이가 끊길 것이다.

 

 뜨거웠던 햇빛이 점차 약해져 가는 어느 가을날이 되어서도 송하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네? 아, 아니, 괜찮습니다. 안 와도 됩니다. ……정 그렇다면 오십시오. 아니요, 싫은 게 아니라…… 오면 저야 좋습니다만…….”

 

 진심을 혀끝에 머금고 밖으로 나오게 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특히나 송하에게는 그랬다. 배신자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스파이였다, 라는 커다란 비밀을 끌어안고 몇 년을 살아왔던 그녀는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와 송하의 차이점을 들어보라고 한다면 아이는 어떻게든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송하는 최소한의 감정을 보여주려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사사에게 그런 자신의 기분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송하가 거실 쇼파에 앉은 그대로 졸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잠도 예전에 비해 많아졌고, 걸핏하면 나른해지는 탓에 제대로 바깥 활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좀처럼 밖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졸린 것뿐만 아니라 간단한 산책조차도 귀찮아진 탓이기도 했다. 하도 졸아서 찾아온 사사를 문 밖에 세워두는 일이 많아졌다. 송하는 아예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졸음 사이사이에 보이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떠도, 감아도 색채는 찬란하다. 조각조각 떨어지는 색들이 몽롱하기만 했다. 그 색들을 파고드는 불안감에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이제 할 일조차 없는, 그저 시간을 헛되이 쓰는 사람이 되어 평생을 살아가야 하나? 아무에게도 쓸모 없는 누군가가 되어? 사사에게 기대고 있는 현실은 어떤가. 제 나름대로 눈치를 본답시고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그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지만 그때마다 큰 도움을 주고 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더 가증스러운 건, 그것을 아무 말 없이 받고 있는 자신이었다. 생각하지 않고 싶다. 무언가에 신경을 쓰자니 머리만 아프고. 아무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아, 세상에. 가증스럽고 뻔뻔한 년.

 

 아무 생각도 안 하겠다고? 아, 잠깐. 앞에 보이는 건 뭐지, 무엇일까. 온통 새까맣고, 까만 것이 마치 날 잡으러 오는 듯 한데. 이제 저 어둠은 온 색채를 잡아먹겠지. 아, 벌 받는 거야. 그래, 아무 생각도 안 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생각해서 벌을 받는 거야. 어디다 빌어야 합니까, 이 불안감을 없애려면. 영정 님? 아니면 사사? 누구든 간에 제발 좀 저를 살려주십시오. 남한테 기대겠다느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는 하지도 않고 힘들다고 누구한테도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나 하나 봐달라는 말, 입도 벙긋 안 할 터이니, 제발…….

 

“송하!”

 

 눈이 번쩍 뜨였다. 햇살은 여전히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사사가 자신의 손을 잡은 채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무언가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사사를 그 ‘무언가’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집에 들어와보니까 잘 자고 있는 것 같아서 방해 안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표정도 안 좋아지고 울먹거리길래…… 그 말을 들으며 송하가 잡혀 있던 손을 빼냈다. 사사는 여전히 걱정이 드리운 얼굴이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마 위로 다가왔다. 큰 손이 한 번에 이마를 덮었다.

 

“열 나.”

“열은요, 무슨. 앉아 있던 자리가 햇빛 받는 쪽이어서 그럴 겁니다. 햇빛이 얼굴에 닿아서 그렇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사사의 손을 치웠다. 설령 자신이 정말로 아프다고 해도 아프다는 것을 빌미로 신세 질 생각은 없었다. 그때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자신을 잡으러 오는 존재가 비록 현실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하더니 사사가 일어나 부엌에 놓여 있던 것을 갖고 오기 시작했다. 키가 큰 그는 걸음걸이는 똑발라도 가끔 보면 휘청이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모양새만 놓고 보면 마치 홍학과도 같이 다리만 기다란 것이, 영락 없는 새였다. 새의 종만을 따지고 보자면 그는 까마귀지만. 자, 봐봐. 아까 이거 사왔어. 어느새 돌아온 사사가 큼직한 흰 봉지를 눈앞에 보여주었다. 봉지 안에서 흘러나오는 냄새가 얼마간은 익숙하다.

 

“고구마?”

 

 이런 것을 제가 사다 두었던가. 하기야 요즘은 어떤 행동을 해도 머릿속에 남는 것이 별로 없기는 했다. 다소 멍하게 묻는 그녀를 보며 사사가 웃었다. 아까 이거 사왔어. 좀 식기는 했지만 맛있을 거야. 껍질 까는 연습을 많이 해봤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 속살이 보였다. 제가 먹을 것은 아니었는지 어느새 송하의 손에 고구마가 들려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먹으려고는 했으나 입에 대는 시늉만 몇 번, 입에 들어가는 양은 한 숟가락 정도도 되지 않았다. 왜 더 먹지 않느냐는 눈빛에 송하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먹으면 소화가 되지를 않아서요. 몸이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먹기 싫다는 사람한테 계속 음식을 권하는 건 좀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사사는 먹을 것을 더 권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있다가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 듯 웃었다.

 

“오늘 있지.”

 

 다소 서투른 발음으로 사사가 짐짓 밝은 얼굴로 외쳤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무엇을 너와 함께하며 금요일 저녁을 보낼까 하다가 영화관에 가서 영화도 보고, 팝콘을 먹으면 어떨까 했다고. 그 다음에는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서 놀자. 물론 네가 원한다면 그냥 집에서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영화를 보며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는 것도 좋을 거라고 제안했다. 조심스런 제안에 송하는 어떻게든 사사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주기 위해 노력했다.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미소를 짓는 등, 그녀로서는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제안은 고맙지만 일을 하고 바로 우리 집에 왔을 텐데 밖에 나가는 것은 사사에게 무리일 것 같다,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며 송하가 그렇게 말을 하니 사사는 거절할 것도 없었다.

 

“와, 한다!”

“그러게요.”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영화는 의외로 비교적 최근에 개봉한 것으로, 화면에 가득 찬 화려한 색감이 관객들을 사로잡을 만 했다. 샛노란 노란 색에 강렬한 붉은 색. 그것들을 보며 사사는 몇 번이고 감탄했다. 화려한 걸 좋아하는 까마귀의 습성으로 보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어쩌면 날개를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송하가 보기에는 무채색으로 가득한 사사도 충분히 빛나 보였다. 하얀 이마에 유달리 검은 머리카락이 땀으로 인해 달라붙었다. 코트가 덥다, 덥다 하더니 기어이 벗은 코트가 쇼파 팔걸이에 걸쳐져 있다. 그의 날개는 그의 코트 색보다도, 칠흑보다도 더 검다. 눈동자는, 더욱 까맣고. 아, 까만 건 사사 빼고 전부 무섭다. 언제 어디에서 그녀를 향하는 칼날이 있을지 몰랐다. 어둠 속에서는 검사로서의 실력도 그녀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그날을 생각하자 송하는 몸을 떨었다. 다행히 사사는 알아채지 못한 듯 싶었다. 그저 이따금씩 저를 보며 웃는 사사의 얼굴에 마주 웃어주었다.

 

“그럼 주무십시오.”

“응.”

 

 텔레비전을 끄자 사람이 두 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실은 한없이 조용했다. 영화 후반부쯤에는 고개가 꺾어질 정도로 졸고 있던 사사를 송하가 어깨를 흔들어 깨워 편히 자라며 쇼파에 베개와 이불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막상 송하와 잘 자라며 인사를 하고, 방으로 송하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자 잠이 달아나버렸다. 엎드린 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저와 송하는 사귀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애매한 관계였다. 아마도 사귀는 쪽에 가까운 관계라고 본다. 그렇지 않고서야 관계를 진전시킬 생각이 없다면 손가락 하나조차 용납하지 않을 그녀가 손을 잡으면 더욱 힘을 주어 마주잡아올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친구일 뿐이라 해도 남자인 자신을 집에 재워줄 리도 없고. 닫혀진 문틈 사이로 미약하게 불빛이 보인다. 아직 송하는 자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요즘 많이 달라졌다. 일찍 일어나 수련을 하던 몸이었는데 이제 그녀는 동이 틀 때쯤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잠을 자면서 햇빛을 맞는 것을 선호한다. 한 사람의 기호가 평생 가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바뀔 수 있겠다고 사사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한 달이 가까이 지나는 동안 오늘은 뭐 했어? 라는 질문에 그냥 있었습니다, 라는 대답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좀 문제인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가끔씩 전화를 받지도 않고 하루나 이틀 동안 연락 두절인 날이 있다는 것이었다. 출장이 걸려 송하를 직접 만나러 가지는 못하고 전화를 걸었더니 처음에는 받지 않았다. 그래, 처음 한 번은 일이 있어 받지 못했나 보다, 혹은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다 하고 이해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또 한 번 걸었던 전화도, 30분도 참지 못하고 다시 건 전화도 그녀는 응답하지 않았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고 가슴을 졸였다. 일을 때려치우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어린 팀원들 때문이었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신경을 써야 해 그도 바빴다. 출장이 끝나자마자 송하의 집으로 달려가니 왔습니까, 하고 맞아주었다. 사사는 속이 탔고 그녀는 퍽 태평했다. 전화가 온 줄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서 하지 않았습니다, 하더니 변명은 거기서 끝났다. 뒤돌아서는 몸을 돌려세워 단정한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많이 걱정했으니까 다음부터는 문자 메세지라도 한 통 남겨달라 부탁했다. 그녀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이 지켜진 적은 거의 없다.

 

 그녀는 자주 아프다. 어느 날은 볼이 미어지도록 여러 가지를 먹다가도 어느 날은 물조차 입에 대지 않는다. 그 때문에 체중은 들쑥날쑥, 제멋대로 체중계를 왔다 갔다 했다. 언제인가부터는 먹어도 흡수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 이른 것인지 살이 찌지를 않았다. 바짝 마른 팔목이 안쓰럽고 볼이 패인 얼굴이 마음이 아팠다. 자주 감기에 걸리고 앓는 일이 잦아져 눈이 퀭하고 몸은 항상 미열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사는 죽 집을 하도 자주 찾아가자 그 집 아내가 몸이 많이 아프냐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내과에도 데려가 보았지만 그저 피로가 쌓여서 그런 것뿐이라며 자주 쉬게 해주라는 말만을 해줄 뿐이다. 그러니 이 이상 어떻게 쉬게 해주어야 하는지 사사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시들어갔다. 병원을 나온 후 시무룩해진 사사를 송하가 끌어안았다. 역시나 팔이 뜨끈했다. 그녀는 몸 속에 불이라도 간직하고 있는지 나날이 몸이 뜨거워진다.

 

 그녀는 예전과는 달리 확실히 뭔가 이상했지만 뭐라고 꼬집어 말할 거리가 없어 사사는 말하려다 침만 삼킨다.

 

 오늘도 같이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어느 정도 늦어진 시간에 밤 인사를 하고 각자 자리를 찾아 든다. 사사는 습관처럼 자기 전에 이곳 저곳을 보았고 송하의 방 쪽에 여전히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본다. 30분, 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불이라도 꺼줄까 하다가 이건 너무 안 해도 될 행동을 하는 것 같다 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도 너무 불이 안 꺼지는 것 같아 결국은 사사가 부스스 일어섰다. 환한 불 아래에서 자면 아무리 많이 잔다고 해도 몸의 피로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혹시 그녀가 깰까 봐 걱정되어 살며시 문을 열었다. 당연하지만 불만 끄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침대 끝에 웅크려 앉은 모습이 보여 사사는 깜짝 놀란다. 그녀는 제가 들어온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송하?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톡 붙잡자 그녀는 겁먹은 얼굴을 하며 돌아보았다.

 

“나야.”

“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려고 하는 얼굴에는 선연한 공포가 드러나 있었다. 놀라 크게 뜬 눈과 바르르 떨리는 입술이 평온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사를 알아본 그녀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려 하지만 공포로 인해 벌려진 입은 좀처럼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몇 번이고 올라가려던 입 꼬리가 아래로 처진다. 종국에 가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찡그린 얼굴로 눈물을 터뜨리는 송하를 끌어안았다. 요 며칠 그녀는 이상했다. 별 것 아닌 것에도 경계하고, 예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울려고 한 게, 그게 아니라…… 저도 지금 왜 이러는지…….”

“응.”

“뭔가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말할 수는 없는데, 하여튼 제 자신이 제가 아닌 것 같고…….”

 

 피곤해서 그런 거야. 송하는 아주 오랫동안 다른 곳에 가 있었잖아? 이제야 돌아와서 그 동안 힘들었던 게 터져 나와서 그럴 거야. 송하는 이상해지지도 않았고, 어딜 봐도 송하라는 걸 알겠어. 갈색 손에 꼭 쥐어진 사사의 셔츠 자락에 눈물자국이 번졌다. 동심원을 그리며 퍼진 눈물자국이 하염없이 슬펐다. 그제서야 사사는 송하에게 깃든 것은 몸이 아닌 마음의 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다음날, 송하에게 병원을 가자고 하니 그녀는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좀 기분이 나아진 것 같습니다, 어제는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랬나 봅니다, 등등 영 미덥잖은 소리를 하며 태도를 싹 바꾸는 송하를 이끌고 병원을 찾았다.

 

 자, 지금부터 SCT 검사를 실시할 건데요, 이 종이를 보시면 몇 가지 문항들이 쓰여 있는데 빈칸을 채워 문장을 완성해주시면 됩니다.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오래 끄시는 건 삼가 해주시고요, 깊이 생각하실 필요 없이 그때그때 떠오르는 걸 쓰시면 됩니다. 너무 두루뭉술하게 쓰기보다 자세하게 쓰면 더 좋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며 상담사가 연필과 종이를 건네준다. 송하는 곰곰이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1. 나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을 때                        .

2.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

3. 내가 어렸을 때는                     .

4.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잊고 싶은 것은                     .

5.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나만의 두려움은                   .

 

 송하가 검사를 하러 들어간 동안 사사는 불안한 기색을 잔뜩 보이며 대기실 쇼파에 앉아 있었다. 과연 검사를 제대로 마치고 나오려나 걱정이 되었다.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시계는 아직도 10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꼬박 하루를 지난 것 같은 시간이 흘렀을 무렵 드디어 송하가 대기실에 모습을 보였다. 사사가 반색하며 그녀에게 다가간다. 검사 비용을 계산하는 사사를 쳐다보며 안내원이 빙긋, 지극히 서비스에 가까운 미소를 보였다.

 

“다음주에 오시면 결과를 알려드릴 거에요.”

“네.”

 

 다음주에 하루 정도는 일을 몰아서 하고 송하와 같이 병원을 오면 되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는 사사에게 송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다, 사사는 날 독립적인 성인이 아닌 어린 아이로 보는 것이 아니냐며 거부 반응을 드러내는 송하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런 건 아니야, 하고 사사가 급히 변명을 시작한다. 널 혼자 보내는 것이 걱정이 되는 것보다는 내가 따라오지 않으면 불안해서, 결국에는 그것이 전부 내게 위안이 되는 일이라 그렇다며 송하를 달랬다. 가까스로 달래놓은 그녀는 여전히 입술이 살짝 나와 있다.

 

 겨우 송하를 달래 같이 병원에 가서 결과를 보는 것으로 새끼 손가락을 몇 번이나 걸었지만 그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일을 해도, 해도 산더미인 까닭이었다. 약속을 깨서 미안하지만 병원에 같이 가지 못하겠다고 전화를 걸자 그녀는 그 소식을 반가워했다. 전화기 너머의 사사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리고 아마도 그 생각은 맞을 것이다. 조금 섭섭했지만 송하는 아픈 것을 자신에게 더는 보여주기 싫은 것일지도 모른다며 홀로 마음을 토닥였다. 섭섭한 마음이 풀린 것은 그녀가 그녀에게 상담이 필요한 것 같다는 말에 수긍을 했고, 상담 시간을 잡았는데 같이 가려느냐고 물어왔을 때였다. 시간은 매주 화요일 오후 두 시. 사사는 화요일 오후에 해야 할 일을 월요일에 전부 몰아서 하는 것으로 다나와 약속을 했고 그날은 일찍 퇴근하게 되었다. 첫 번째 상담도, 두 번째 상담도 그녀는 같이 가게 해주었다. 그녀는 두 번째 상담 시간이 끝난 후 느닷없이 서점을 가자고 했다. 책을 읽고 싶어 그러는 것인지 물었더니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한 방법으로 일기를 쓰는 것을 제안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보여줄 필요는 없어요. 며칠에 한 번이어도 괜찮고 하루에 여러 번 써도 괜찮으니 쓰고 싶은 만큼 쓰면 됩니다. 너무 오랫동안 안 쓰지만 않으면 다른 것은 뭐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송하 씨가 다른 이들에게 하지 못하는 말,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말을 노트에 털어놓음으로써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사는 그녀를 위해 화사한 꽃무늬 노트를 골라주었다. 그녀는 군말 없이 그것을 샀다. 그녀는 사사가 저를 찾아오면 가끔 노트에 뭔가를 쓰다가 덮고는 했다. 나중에 맞아주어도 괜찮으니 쓰던 것을 마저 쓰라고 하면 그럼, 잠시만, 하고서 쓰던 것을 마쳤다. 그 노트는 언제나 텔레비전 옆에 위치한 탁자 위에 놓여 있었지만 사사는 결코 그것을 건드리는 일이 없었다. 그곳에 놔둬도 사사는 결코 보지 않을 것이라는 송하의 믿음을 깨고 싶지 않았다.

 

XX월 XX일

 오늘은 노트를 샀다. 사사가 골라준 꽃무늬 노트이다. 화사한 것이 나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사사는 이것을 골라주며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다정한 사람.

 

 다섯 번째, 혹은 여섯 번째의 상담 시간이었을까, 사사는 멍하니 대기실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그럴 수 있어요.”

“큰 충격으로 인해 그렇다고 봐야 할 겁니다…….”

 

 작게 흘러나오는 소리들. 그는 가까스로 그런 말들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문득 문이 열리고 송하가 튀어나왔다. 모두들 당황한 기색이다. 사사가 서둘러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허락 없이 만지는 것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누구라도 달래야 진정이 될 듯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떠는 어깨를 쉴 새 없이 쓰다듬었다.

 

“……왜 그래, 응?”

“저…… 전 하기 싫습니다! 이제 이런 것, 질렸습니다!”

 

 그녀가 외쳤다. 너무나 큰 소리로 외친 탓에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물론이요, 사사까지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사사는 송하에게 얼굴을 찌푸리지도, 싫은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래, 송하, 이해해. 넌 언제나 강한 사람이니까, 남에게 기대는 것이 낯설고 힘들겠지. 그래도 한 번 해보면 좀 낫지 않을까? 모르는 사람인 만큼 이것저것 편하게 말할 수 있을 거야. 자신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다면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몇 마디 말이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이 송하의 괴롭고 슬펐던 부분들을 그녀에게서 듣지 못해도 좋으니, 다른 이들에게서라도 송하가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냥……. 하기 싫습니다. 그냥 싫어요. 누구나 하나쯤 하기 싫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제게는 이런 곳에 오는 것이 그런 일입니다.”

“……그래?”

“네. 그러니 나가면 안 되겠습니까?”

 

 무작정 싫다며 아이처럼 발까지 동동 구르는 송하는 그녀답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서 나가자며 그의 손을 끌어당기는 모습을 모른 척 하는 것도 어려웠다. 어차피 한 번 오고 말 곳도 아니니, 이번만은 그녀 마음대로 하게 해주자는 심정으로 그가 그녀의 손을 고쳐잡았다. 다음에 오겠습니다, 하는 듯이 사사가 접수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송하는 무섭도록 예의를 차리는 평소와 달리 고개를 숙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서둘러 걸음을 했다. 재빠른 걸음걸이의 그녀를 따라 허둥대다 하마터면 문에 머리를 부딪힐 뻔 했다.

 

“우리, 뭐 좀 마실까요?”

 

 이상하리만치 진저리를 치는 그녀에게 말하기 싫을 만큼 힘든 일이 있었느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묘하게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병원은 나중에 가겠습니다. 나중에 꼭 갈 테니 걱정 마십시오. 아까는 기분이 좀 그랬습니다. 별 것 아닙니다.”

 

 혹여나 병원에 억지로라도 데려갈까 걱정이 되었는지 주섬주섬 변명을 주워섬기는 모습은 자신이 익히 보아 온 송하의 모습과 상당히 달라서 심히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일단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짓는다. 지금까지 수없이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혼자 병원을 찾아가보았지만, 법적인 관계의 보호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담자의 상담 내용을 알려줄 수는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래도 몇 가지 주의사항이라도 알려달라고 하자 지나치게 내용을 빽빽하게 쓴 점, 어느 부분은 간단하게 썼지만 또 다른 부분은 이상할 정도로 강조해가며 쓴 점 등을 들어가며 차근차근 예를 들어주었다.

 

 아무래도 자세하게 쓰면 쓸수록 좋죠. 내담자의 상태를 파악하기에 도움이 되니까요. 그런데 문장을 쓰는데 굳이 불필요한 수식어를 몇 개씩 넣어가면서 썼다는 것은 감정적인 부분에서 뭔가 후유증이 남아 있다고 봐야 할 거고요. 또 어떤 부분은 정말 단순하게 썼죠. 이 부분에서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담자 분의 속마음일 수도 있고요, 실제 겪었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송하는 마음의 어디가 많이 아픈 것일까.

 

XX월 XX일

 오늘은 어제와 똑같고. 사사는 좀처럼 먼저 전화를 걸지 않는다. 여러 달 전에는 그토록 다정했는데. 그 애정을 달라고 하면 너무 이기적일까. 어쩌면 이제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다정하니 다정한 이를 만나겠지.

 

XX월 XX일

 내가 봐도 내가 별로인데, 사사도 그럴 듯하다. 내가 짜증스러울 수도 있겠다. 눈가에 비친 짜증스러운 표정. 더는 내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야 하는데.

 

XX월 XX일

 힘든

 힘든 적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봐야 지나간 일일 뿐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송하에게 전화를 하지 못했다. 전화를 잠시라도 걸려고 하면 누군가가 저를 부르고는 하는 것이다. 여러 번 그것이 반복되자 사사는 지쳐 있었다. 마침내 전화를 걸 틈이 생겼을 때, 그녀는 받지 않았다. 오늘은 전화를 받기 싫은 날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저녁, 혹은 내일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가야 되겠다. 사사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혹시나 송하가 전화를 할 경우를 대비해 진동으로 해놓는다.

 

 내 귀한 당신께.

 

 흰 종이에 펜으로 서두를 적은 그녀가 한껏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지어보는 행복한 웃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이후로, 그녀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이 아니라 참말로, 그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원한다면 사사처럼 날개를 가질 수도 있을 터. 참으로 힘든 결정이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잘 견디어냈느냐, 스스로를 다독였다. 비로소 편안해진 마음이었다. 얼굴에 웃음이 만발했다.

 

 그러니 이제…….

 

 

 

 

 

 

 

 

 

2부: 너는 비처럼 쏟아졌다

 

 

 

 

 

 

 

 

 

 송하가 자살했다. 치맛자락이 길게 늘어지고 그 아래로 하얀 버선발을 내놓은 채 그렇게 갔다고 했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는 모른다. 되짚고, 또 되짚어봐도 이유를 찾기가 힘들었다. 하기야 내 앞에서 너는 언제나 그 표정 그대로였었지. 몽상은 비집고 들어가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던 그 변함없는 얼굴에 모든 것을 다 감내할 만큼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송하는 왜 죽었을까. 생각해보면 수상쩍은 부분도 있더랬지.

 

“응?”

“말하면 안 되는 겁니다.”

 

 가끔씩 뭔가를 말하려던 입술은 답을 주지 않았다.

 

“왜?”

“비밀입니다.”

 

 내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송하는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돌아간다. 그녀의 죽었을 당시의 충격은 어느 정도 옅어져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을 수 있게 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SSRI, NDRI, SNRI. 탁상 테이블 위에 놓인 약병들을 무심히 살펴보며 아무 생각 없이 읽어 내려갔다. 한 번에 한 알씩, 약의 종류는 세 가지니 총 세 알을 먹어야 하는 셈이다. 먹어야 할 약들을 물과 함께 삼켰다. 범죄자 조직 소탕, 인질 구출 등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스푼 사원들이 겪을 트라우마와 정신적인 건강을 생각해 미리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약이라는데, 이런 일을 실시하다니 서장님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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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웅은 싫어 사사GS송하 - 바람결에 꽃내음처럼

 

 

 

 

 

 

 

 


 

바람결에 꽃내음처럼

 

1부: 네가 오니 눈물이 그쳤지

 

 

 

 

 

 

 

 

 

 


 

 

 “여보세요? 서장님? 듣고 계시죠? 지금 이 상황이 저희도 상당히 당황스러워서요…….”

 

 전화를 받은 다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더라고요. 초록 머리에 칼 쓰는 사람은 나이프에서는 그 사람밖에 없잖아요. 저희는 현장 수습하러 온 건데, 사람이 죽은 줄 알고서 다가갔는데 살아 있으니까 놀라기도 하고, 이 사람이 그 사람인 줄은 몰랐으니까 더더욱 놀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서장님께 전화 드렸어요. 여기에 계속 있을 수는 없겠다 싶어서 출발하긴 했는데, 40분쯤 후면 스푼에 도착할 것 같아요. 뭐, 어쨌든, 나이프 일은 스푼 책임이니까요.

 

 아, 하고서 목소리를 죽여 감탄사 비슷한 것을 내뱉은 후 다나가 이마를 짚었다. 예상치 못한 일에 스푼에서는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이름조차 입 밖으로 내는 것이 껄끄러워 배신자, 그때 그 사람, 등등으로 불렀던 사람이었다. 스푼 직원이 말을 한 대로, 40분 정도가 지난 후에 다나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한 여인을 맞아야 했다. 이것은 전혀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송하가 잡혔다는 소식을 미리 들어 알고 있던 스푼의 윗선에서도, 송하를 직접 맞닥뜨려야 하는 스푼 측에서도.

 

 송하는 여전히 뻣뻣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수많은 부상을 당한 것이 분명함을 보여주는 피투성이 옷 차림새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는 당당하게 들려져 있었으며 걸을 때마다 절뚝거리는 다리도 서 있을 때는 멀쩡해 보였다. 스푼 복도를 지나가는 척 하며 힐끔힐끔, 송하를 보러 온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제가 섬기는 백모래를 닮아 미친 듯이 뻔뻔하다고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느 누구의 귀에 들어갈 만큼 대놓고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다나는 물론 스푼의 책임자답게 허리를 쭉 핀 채 송하를 쳐다보았다. 곁에 서 있는 귀능에게 사사에게는 말하지마, 라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녀가 속삭이는 말을 들은 귀능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년간 다나의 비서로서 활동해온 귀능의 감이었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송하의 처우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사에게 송하가 스푼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은 섣부른 행동이 될 수도 있었다.

 

 송하의 눈빛에 상처 입은 기색이 스며든 것은 그때 뿐이었다. 그나마도 풍성한 속눈썹과 내리깐 눈길 덕택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앉아.”

 

 앉으라는 손짓에 따라 앉으니 철제 의자의 찬 기운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송하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꺼운 유리창 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창 너머로 자신의 모습이 보일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취조실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아니던가.

 

“네 취조는 내일부터다.”

 

 잡힌 백모래의 부하가 아끼던 부하 직원이었다는 사실이 다나로 하여금 머리 아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범죄자 집단에 가담한 전 스푼 직원일 뿐이지. 다나는 항상 그렇듯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이 이제까지 사건사고 많은 스푼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며칠 후 다나는 놀라운 소식을 통보 받았다. 영정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사실은 스푼 전체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취조실로 향하며 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아무것도 처리되지 않았다. 송하의 일도, 나이프에 대한 것도. 거기에 더해 영정의 사망 소식까지 그녀를 무겁게 짓눌렀다.

 

 취조실로 불려온 송하는 며칠을 철창 안에서 밤을 새느라 기진맥진한 얼굴이었다. 송하가 무겁기로 유명한 입을 열었을 때는 오늘의 취조가 시작된 지 몇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계속 이런 식이면 너도, 나도 힘들어. 어떤 말이라도 들을 때까지 붙잡아놓을 거다.”

“그분이 원하시니 한 것 뿐입니다.”

 

 허, 아주 대단한 충성심 납셨어. 저도 모르게 혀를 찰 뻔한 것을 다나는 겨우 참아냈다.

 

“누구, 백모래?”

 

 송하가 고개를 저었다. 바짝 마른 입술은 갈라지고, 부르터있었다.

 

“모든 건 영정 님의 뜻이니까요.”

“영정 님?”

 “제 모든 의지는 그분의 것입니다.”

 

 백모래도 아니고, 영정 님? 뜻밖의 이름에 다나는 침묵했다.

 

“영정 님은 돌아가셨다. 네가 그분에게서 어떤 명령을 받았든 간에, 모든 활동은 종료되었다고 봐야 하겠지.”

 

 송하의 입술에서 탄성이 흘러나온 것은 고작 몇 초의 시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일어날 뻔한 것인지 셔츠에 휘감긴 팔은 딱딱한 테이블에 얹어져 있었다. 그리고 다나는 보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마음과 몸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몰라 허둥대는 짧은 수초의 시간을 다나는 인내심 있게 참아주었다. 다나는 그녀가 연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마음 속으로부터 깊은 충격을 받아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은 거짓인 쪽으로 두기로 했다. 그녀가 영정의 편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녀가 말한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송하가 이 정도로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나? 이렇게까지?

 

“그러니 이제는 말해도 상관 없다고 본다. 네가 어떤 명령을 받았는지, 그분이 네게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는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꼭 깨물더니 송하가 갈라진 입술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몇 년 전인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다소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영정에게서 명령을 받아 나이프에 잠입했다는 것과 기타 등등의 이야기들. 이야기를 바로 앞에서 듣고 있는 다나도, 창문 너머에서 듣고 있던 귀능 역시 눈이 둥그래졌다. 아무도 그녀가 스파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었다. 설마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지금 이곳에 있는 겁니다.”

“……흠, 그래. 네 이야기는 잘 들었다.”

 

 이야기를 꾸며낸다고 보기에는 내용에 모순이 하나도 없이 아귀가 들어맞았다. 단 하나의 모순점조차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가 거짓일 가능성도 있을까? 다나의 감은 거짓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야. 영정 님이 널 죽이려고 했다고? 치명상을 입기는 했지만 죽은 건 네가 아니라…….”

 

 죽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영정이었다. 밀려오는 슬픔에 송하가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영정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가 자비를 베푼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죽일 생각이었으나 의도치 않게 힘의 어느 부분이 엇나가 자신을 죽이지 못한 것인지. 문득 눈꺼풀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가 멍했다.

 

“그건 저도 잘…….”

“야!”

 

 점차 느려지던 몸동작을 눈치채고는 있었다. 다나가 손을 뻗어 잡기도 전에 송하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고, 의자가 나동그라졌다. 그 동안 숨겨왔던 커다란 진실을 토해낸 몸은 한없이 야윈 탓에 가녀려 보였다.

 

“영정 님은 유서조차 없었잖아?”

 

 다나가 서장실 책상 앞에 앉아 책상을 툭툭 두드리다 귀능을 쳐다보았다. 송하의 말이 사실로 증명되는 것인가 싶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자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눈매가 가히 매와 비교될 만하다 생각하며 귀능이 서둘러 들고 있던 서류를 넘겼다.

 

“네, 유서는 없었죠. 하지만 혹시나 싶어서 영정 님의 집을 여기저기 둘러보니, 짠, 이런 게 나왔지 뭐에요?”

 

 귀능이 들고 있던 여러 장의 종이를 다나가 서둘러 가져갔다. 아이, 서장님, 제 말 좀 들어보지 않고선, 하고서 투정 부리던 귀능은 제 알 바 아니었다. 종이들을 뒤져보던 다나가 이 정도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문서라 볼 수 없었지만 송하라는 이름과 영정 자신의 이름, 업무에 관한 것 같아 보이는 글자들은 송하가 어느 정도 영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놓고 스파이라거나 비밀 임무, 라고 쓰여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 정도로도 어디랴 싶었다.

 

 그러나 송하를 눈엣가시로 여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된 은퇴자로서의 대접을 해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고민을 해결해준 것이 뒤늦게 달려온 사사였다. 송하가 영정으로부터 몇 가지 명령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으므로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윗선에서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 사사가 아침 일찍부터 서장실을 찾았다. 본인의 퇴직금의 일부를 미리 떼서 송하에게 주고 싶다며 말을 해왔다. 윗선이 결정한 내용은 아직 송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테니, 자신이 주었다는 말은 하지 말고 스푼에서 수고했다는 의미로 주는 것이다, 라고 말을 해달라는 요구 사항까지 붙여서. 퇴직금을 받는 당사자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니 다나가 말릴 수는 없었다. 평소에는 스스로 뭔가를 해달라며 입을 떼는 것조차 어려워하더니 송하를 위해서, 라는 생각 하나로 뭐든지 할 힘이 나는 모양이지, 라며 뒤에서 다나가 귀능에게 한 말대로였다.

 

 계절이 바뀔 때쯤, 송하를 붙잡아놓을 명분이 없다며 스푼에서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사사는 이름 한 번 부르지 못한 채, 얼굴을 마주한 송하에게 웃어야 할 지, 눈물부터 쏟아야 할 지 갈팡질팡했을 뿐이다.

 

“돌아왔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그녀와 그의 사이에 오랜 기간의 헤어짐은 없었다는 것마냥 그렇게 속삭였다. 적으로서 날을 세웠던 날들을 전부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치부해버리는 듯한 나직한 말투가 너무나도 당연해서, 그녀가 돌아왔다는 기쁨에 취해서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을 뿐이다. 나중에 가서야 그는 그러지 말 걸, 하고 후회했다. 조금 더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고 관심을 가질 걸. 절망과 쓰라림이 얽힌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봤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의 그는 확실히 행복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행운의 여신이 자신의 편이 되어주었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그에게 돌려보내주기로 결심한 운명에 감사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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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웅은 싫어 사사GS송하 - 안녕, 휴일

 

 

 

 

 

안녕, 휴일

 

 

 

 

 몸을 일으키니 곁에서는 송하가 반쯤 눈을 뜬 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니 온 세상이 초록색이다. 이대로 송하를 쳐다보는 것도 좋지만 배가 고파 결국은 일어섰다. 방문을 나서 부엌을 찾았다. 냉장고를 뒤적이다 요거트를 하나, 찬장을 살피다 숟가락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런 짓을 하면 송하가 안 좋아할 텐데, 싶었지만 혼을 내더라도 오늘만큼은 봐줬으면 좋겠다. 침대 시트 위에 늘어진 머리카락이 불규칙적인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밟지 않게 사사가 시트를 조심조심 밟았다. 사박사박, 눈 위를 걷는 것도 아닌데 발을 옮기는 소리가 매끄럽다.


“침대 위에서는 뭘 먹지 말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만.”
“오늘만.”
“…….”


 방긋거리며 웃으니 새초롬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저 표정은 허락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며 고마워, 하고 중얼거렸다. 냉장고에 딸기 맛이 하나밖에 없어 송하에게 양보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블루베리 맛 요거트를 골라왔는데 예상 외로 이것도 꽤 맛이 좋다. 먹으며 송하를 힐끔거리니 뭐라 말을 하려는지 붉은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닫혔다. 뭘 하려는지는 몰라도 송하가 침대를 벗어나길래 그녀가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사가 그녀를 위해 남겨둔 딸기 요거트와 은색 숟가락을 가져온 송하가 와이셔츠 차림으로 침대에 주저 앉는다. 평소에는 침대 위에서 뭘 먹는 것을 질색하더니 오늘은 예외인 건지 참 잘도 먹는다. 숟갈을 놀리는 손짓도, 먹기 위해 벌리는 입술도 예쁘다. 이것도 저것도 다 이쁘다는 생각에 요거트 통을 쥐고 있던 하얀 손이 시트 위를 향했다. 그 위에 놓여진 요거트가 아슬아슬, 넘어질 것 같으면서도 좀처럼 넘어지지 않는다. 사사가 그만 먹든 말든, 송하는 제 것을 먹는 것에만 집중한다. 플라스틱 통을 긁는 숟가락 소리가 요란했다. 송하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음이다. 거의 다 먹어가는 것이 보여 살며시 손을 잡아 내렸다. 그녀는 무슨 할 말 있느냐는 듯이 갈매빛 눈을 동그랗게 뜬다. 늘 예쁘다고 생각했던 속눈썹 긴 밤빛 눈이 가까이 다가온다. 입을 맞추며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숨이 막혔다. 송하가 요거트 통을 쥔 채 침대 머리맡을 더듬거렸다. 도대체가 한 번 시작하면 다른 걸 할 틈을 안 준다. 요거트 통은 손짐작으로 겨우 대충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두었다. 요거트를 치우는 그 짧은 시간을 못 참고 탁자 위를 더듬는 손마저 잡으려는 걸 제지하며 어깨를 때렸다. 맞댄 입술에서는 달달한 냄새가 난다. 아, 블루베리 맛.


 침대 위에 올려놓은 나머지 한 손이 요거트 통을 건드려 톡, 넘어진다. 눈으로 그것을 확인한 송하가 입술을 떼며 이런 걸 여기에 놔두면 어떡하냐고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사사 본인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일어난 일, 얌전히 사과하고 뒷처리는 제가 하겠다며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불 빨래해야 된다 그랬잖아, 이따 하지 뭐! 하고 발랄하게 외치는 목소리에 하는 김에 아예 혼자 해버리라고 송하가 반격한다. 괜한 심술, 부루퉁한 얼굴이 귀엽다. 혼자 한다고 해도 세탁기에 넣으면 끝이다. 군말 없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응?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한 순간도 주머니에 없으면 못 살 것만 같은 휴대폰 전원을 끄는 것이 보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손에서 놓지를 않더니 오늘은 웬 일인가 싶다. 그 눈빛을 알아본 사사가 생글거렸다. 원래 휴대폰은 송하랑 연락하려고 있는 건데, 송하가 곁에 있으니까 이건 오늘 필요가 없지. 좋을대로 하십시오, 하고서 송하는 침대를 가볍게 벗어났다. 긴 거울 앞에 가서 서더니 옆에 있는 조그만 바구니에서 고데기를 꺼내 들었다. 여러 번 해본 듯 송하는 머리카락을 능숙하게 고데기로 잡아 내리고 있었다. 원래도 곱슬거렸지만 더욱 곱슬기가 살아난다. 사사가 근데, 하고 말을 시작한다.


“그거, 고데기 때무니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풍성한 웨이브의 녹색 머리카락. 송하가 문득 발끈해 외쳤다. 원래 천연 파마이고, 고데기는 그런 머리를 보다 풍성하게 해주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머리카락의 천연 곱슬 여부를 궁금해하는 사사가 얄미웠다.


“천연입니다!”


 획 돌아보는 눈빛, 매섭기도 해라. 아무래도 화제를 잘못 잡은 것 같다. 아 그래, 그런 거 같았어, 하고 달래듯 말을 하며 사사가 쪼르르 다가와 뒤에 섰다. 초록색 정수리가 보였다. 송하가 어느 정도 크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확한 키는 모른다. 그저 키가 얼마겠거니, 어림짐작해본 적은 있었다. 허리를 끌어안고 턱으로 아프지 않게 머리를 콕콕 찍었다. 짜증내며 허리를 비틀어 빠져나오려는 몸짓에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하고 급히 행동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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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웅은 싫어 사사GS송하 - 0시 0분

 

 

0시 0분

 

 

“자, 다들 야근해야 하니 그렇게 알고…….”


 야단이라도 맞은 것마냥 날개가 처졌다. 빈틈없이 까만 깃털들로 이루어진 날개가 처지는 모습이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보인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가뜩이나 다나가 내민 물품 파손 청구서며 다달이 나가는 두 사람 분의 생활비며, 사사로서는 도저히 오늘 야근은 하고 싶지 않다며 줄행랑을 칠 처지가 못 되었다. 하다못해 송하와 같이 일을 하면 좀 나을 텐데 사랑스런 초록빛 머리카락의 주인은 퇴근을 한 지 오래다. 하얀 얼굴이 울상이다. 오늘은 기어코 밤 열두 시 전에 집에 들어가 송하와 생일을 보내고 싶었는데. 맛있는 생일 케익이며 송하가 주는 선물이 없더라도 송하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그런데 송하와 함께하는 생일이고 뭐고, 아무래도 이번 생일은 야근하며 보낼 모양이다.


 졸다 깨다 하는 야근은 역시나 졸음과의 싸움의 연속이다. 갑작스런 졸음에 고개가 뚝 떨어져 목이 아팠다. 꾹꾹 뒷목을 누르며 속으로 야근을 원망했다. 물론 원래가 남을 원망하지 못하는 성격이니 그마저도 얼마 안 가 사그라질 소심한 불평이다. 웬 일인지 진동을 하는 휴대폰을 급하게 집어 들었다. 발신자를 보니 송하다. 야근의 서러움도 잊고 전화를 받았다. 반가움이 넘실대는 목소리가 야근을 하는 사람 같지 않게 밝다. 송하? 하고 받으니 조심스레 울리는 웃는 소리가 귀엽다. 물론 사사만 귀엽고 아무도 귀여운 점이 어디인지 잡아낼 수 없을 테지만 제게만 귀엽다는 부분이 또 마음에 든다. 그야말로 팔불출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그건 그래, 하고 자신이 먼저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지금 다 와 갑니다.
“응?”


 송하가 그렇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서두도, 뒷말도 전부 잘라먹고 말의 중심만을 가져다가 내미니 사사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정말 다 오기는 한 것인지 야근을 하고 있는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한 채 사사가 묘한 자세로 그녀를 맞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은 덤이어서 송하로 하여금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허둥지둥 다가와 손을 잡고 끌어당기는 바람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동하!”


 어쩐 일이야, 하고 맞는 목소리에는 어리둥절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왔다는 어조가 섞여 있었다. 사사가 제 집도 아닌데 어서 앉으라며 의자 하나를 빼내 톡톡 친다. 얼른 앉으라는 뜻이 명백해서 송하는 얌전히 앉았다. 사사는 여전히 곁에서 웬 일로 와주었냐며 감격하고 있었다.

“어쩐 일은 아니고…….”


 송하가 힐끔 시계를 쳐다보았다. 사사도 덩달아 그녀의 시선 끝을 같이 봄으로써 그녀의 행동을 따라 한다. 어느새 시계가 0시 0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곧 사사가 나이를 한 살 더 먹었음을 알리며 스푼에서 일한 햇수에 일 년을 더하는 것을 알리는 시계 초침 소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송하와 결혼해 맞이하는 첫 번째 생일이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중요했다. 송하가 오자마자 제 생일이 되다니, 송하는 어쩌면 이렇게 타이밍을 잘 맞추는 사람일까. 그 사실이 또 한 번 감격스러워 송하를 끌어안았다. 끌어안긴 품에서 약하게 소리가 났다.


“생일 축하합니다.”


 오늘이 사사의 생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안타깝게도 야근이 걸려 생일의 시작을 스푼에서 보내게 될 것을 인지하자마자 급하게 집에서 뛰쳐나오게 된 것이었다. 밤 열두 시가 넘었으니 케익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미리 사놓은 선물이라도 건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사사의 얼굴에 가득한 환한 미소를 또 볼 수 있겠지. 사사의 목을 살며시 끌어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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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웅은 싫어 사사GS송하 - 가을 아침

 

 

가을 아침

 


 아침 햇살이 나른하다. 거칠게 푹 다가오기보다 차가운 공기를 동반한 햇빛은 역시 가을은 가을이구나, 하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곁에 있는 온기가 포근해 반쯤 떠졌던 저도 모르게 다시 눈이 감겼다. 하기야 송하가 곁에 있다면 뭐든 좋다는 사사의 지론다운 행동이었다. 항상 그런 핑계를 대며 평일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드러눕는 바람에 결혼 전에는 의외로 거의 하지 않던 지각이 결혼 후에는 엄청나게 잦아졌다. 송하는 나 없을 때는 어떻게 출근하고 다닌 거냐며 혀를 차지만 사사로서는 모든 지각이 너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입을 꾹 다물고 말없이 웃게 되었다. 웃음마저도 송하에게는 그렇게 모른 척 빠져 나가지 말라며 사사에게 뭐라 말을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나른한 꿈을 꾸게 만드는 온기가 불현듯 사라지면 사사는 감겼던 눈을 겨우 뜨고 손을 내밀어 그녀를 찾기 시작한다. 그녀 없는 침대는 황량하다. 마찬가지로 그녀 없이는 좋은 꿈을 꿀 수 없다. 반경을 넓게 하여 허우적거리는 손을 송하가 눈치 채지 않을 리 없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반쯤 들어올린 손가락을 잡았다. 살짝 잡은 손을 끌어당기는 힘이 괘씸해 손가락을 툭 떨구려 해봐도 이미 늦었다. 어리광을 대충 받아준 후 혼자 침대로 밀어 넣을 시기는 지난 것이다. 조금만 행동이 빨랐어도 사사를 홀로 자게 만들었을 텐데 후회해봐야 이미…….


 껴안긴 몸은 틀림없이 따뜻하다. 날개 탓인지 사사의 품 안은 이불보다도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한겨울 주말 아침이라면 분명 그 온기가 반가울 테지만 여름도, 가을도 아닌 애매한 날씨에는 그 온기가 반갑지 않았다. 사사의 날개는 오리털 이불보다도 덥다며 송하는 그를 쓱 밀어냈고 그 때문에 사사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는 날이 잦았다. 송하는 유독 그런 것에 단호했다. 손을 잡거나 끌어안는 것, 조금만 더 범위를 명확히 하자면 스킨쉽을 하는 부분에서 그랬다. 그래도 이렇게 끌어당기면 빠져 나오려 애쓰다 몇 분만 지나면 조용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틀림 없이 그럴 것이다.


“사사…….”


 나지막하지만 약간의 짜증을 동반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모른 척 가느다란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조금만 저리 비키십시오.”


 대답 대신 고개만 젓는 폼이 쉽게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체념에 가까운 설득을 해보다 이내 지치고 만다. 그래, 그렇겠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후 송하도 눈을 감았다. 유독 잠이 쉽게 다가오는 가을 아침이다. 갈색 손가락이 까만 날개를 쓸어보다 느리게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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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을 걷다 1


 언젠가부터 어둠이 눈 위에 내려 앉았다. 내가 볼 수 있는 세계는 오로지 까맣고, 까만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송하, 괜찮아?"
"괜찮습니다."

 백모래가 송하의 앞에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송하의 눈동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흔들던 것을 멈추던 백모래가 보기 드물게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당황함보다는 일종의 신기함마저 섞여있는 목소리였다.

"와, 이거 어떡하지?"

 얼마 전부터 눈앞이 흐릿하다 했더니, 이제는 시야가 완전히 깜깜해졌다. 몇 번을 눈을 감았다 떠봐도 보이는 건 까만 어둠 뿐이었다.

"칼은 쓸 수 있으려나."
"할 수 있습니다.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칼을 못 쓰는 건 아니니까요."

 스푼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실력을 가진 검사였었다. 앞이 안 보인다고 해서 그 실력이 어디 갈 리 없었다. 눈이 안 보이는 본인은 놔두고 백모래가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제 송하는 눈이 완전히 안 보이나봐, 어쩌지. 그러면 이제 어떡하냐는 메두사의 목소리도 들리고, 오르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본인은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주변인들끼리 왈가왈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눈이 안 보이니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백모래의 목소리에 섞인 안타까움보다는 신기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지고 가는 것이 느껴졌다. 철이 들기 전부터 갖고 다녔던 칼을 꽉 쥔 채 송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잠시 산책 좀 하고 오겠습니다."
"혼자서?"
"네. 모르는 곳도 아니고, 충분히 혼자서 갔다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누가 좀 같이 가주지, 하는 백모래의 말을 뒤로 한 채 송하가 현관문을 닫았다. 같은 나이프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어느 누가 선뜻 그를 도와주겠다고 나서겠는가. 인간 관계가 서투른 송하였기에 나이프 일원들과는 어느 정도의 관계 이상을 쌓아 나갈 수 없었다. 그것이 이렇게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다. 혼자서 산책을 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송하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킨 뒤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앞이 안 보이는 자신에게는 늘 걷던 거리마저도 새롭게 느껴졌다.

 자신의 앞에서 휘청이듯 몇 걸음 걷고 있는 익숙한 형체를 발견한 사사가 눈을 크게 떴다. 나이프, 송하. 이곳은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공원 안이었고, 둘이서 대치한다고 한들 누구도 그들을 발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사사가 본능적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반응을 했어야 할 송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불안정한 걸음으로 제게로 한 발자국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앞에 제가 있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못 알아볼래야 그럴 수가 없는데. 사사가 어물거리는 사이 송하는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송하가 끝내 휘청이는 순간 사사가 무의식적으로 총을 거두어버렸다. 총을 붙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송하를 붙잡았다.

"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혀 뜻밖의 말에 사사가 굳었다. 자신과 농담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농담이어도, 장난이어도 너무 지나치다. 그리고 제가 아는 송하는 적과 시덥잖은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사사가 송하의 얼굴을 보다가 그의 시선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사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이제 안 잡아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최대한 허리를 피려고 노력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으로 송하가 중얼거렸다. 이건 농담도, 질 나쁜 장난도 아니다. 사사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송하를 놓아주었다. 멀어져가는 송하를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사사가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정말 네게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대체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어둠 속을 걷다 2


"진짜 안 보여? 진짜?"

 백모래가 몇 번이나 그렇게 물었다. 여전히 목소리에는 신기하다는 듯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와, 진짜 안 보이는구나, 하는 듯한 느낌. 마치 실험용 쥐를 앞에 둔 사람 같았다. 눈이 안 보인다는 송하를 앞에 두고 손을 흔들거나 제자리에서 방방 뛰어보이는 등, 별 짓을 다 하고 있었다. 자기 말로는 지금 손을 흔들고 있다는데, 송하에게는 손의 흔들림으로 인해 일어난 바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백모래의 똑같은 질문의 반복에도 송하는 몇 번이고 대답해주었다. 진짜 안 보여? 네, 안 보입니다. 몇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게 듣기 싫다며 메두사가 백모래를 한 대 친 끝에야 의미 없는 질문과 대답의 반복이 끝이 났다.

"근데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지?"

 메두사가 팔짱을 낀 채 백모래의 옆에 앉아 이상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그렇게 됐을까."

 오르카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혹시 산에서 수련하다가 독성이 있는 것을 잘못 섭취하셨다거나..."
"그럴 리는 없습니다."

 송하가 고개를 저었다. 산에서 자라나는 수많은 식물들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산은 그에게 매우 친숙한 장소였고, 독성이 있는 풀을 함부로 섭취할 만큼 조심성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독성이 있는 풀을 먹었다 한들 이렇게 며칠에 걸쳐 효과가 나타날까. 백모래가 별안간 앉은 자리에서 자세를 약간 바꿔 소파에 반쯤 드러 누웠다. 송하는 더이상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백모래가 배가 고프다며 배를 툭툭 두드리더니 송하의 눈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것마냥 딴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 나 배고파. 오르카, 우리 오늘 저녁 뭐야?"
"보스, 지금 저녁 얘기를 할 때에요?"

 메두사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찰싹, 가볍게 등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갑자기 눈이 안 보이게 됐다면 어느날 갑자기 시력이 돌아올지도 모르지."

 언뜻 들으면 무정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백모래의 말이 맞았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백모래 님 말씀이 맞습니다. 일단 며칠 두고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군요."

 송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놀란 것은 오르카였다. 아무리 별 감정 없이 무덤덤하게 사는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자신의 눈인데, 무엇보다도 불편할 사람이 저렇게 쉽게 말을 할 수가 있다니. 어쩌면 시력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저리 쉽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여러가지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오르카가 혀를 내둘렀다.

"뭐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으세요?"
"난 계란찜!"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느냐는 말에 백모래가 신나게 외쳤다. 백모래의 바램대로 그날 저녁 식탁에는 계란찜이 올라왔고, 역시 오르카의 음식 솜씨는 최고라며 백모래가 칭찬을 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떠들썩한 저녁 식사 시간, 송하 혼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눈이 보이질 않으니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있나. 어림짐작으로 뭐가 어디에 있겠구나, 하고 손을 뻗어 보기는 했지만 번번이 허탕을 쳤다. 그러다가 끝내는 숟가락을 놓아 버렸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송하를 보며 백모래가 소리쳤다.

"송하, 밥 다 먹었어?"
"네."
"이제 자러 가려고? 잘 자!"

 백모래가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나이프 아지트의 구조는 대체로 바뀌지 않는 편이었고, 아지트 안에서는 그나마 무리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송하가 방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몇 번을 눈을 깜박여 보았다. 보이는 것은 어둠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싶어서였다. 송하가 늘 갖고 다니던 검을 톡톡 건드렸다. 아주 오래 전부터 가지고 다녔던 검이었다. 그러니까, 스푼 시절에서도 이것을 갖고 다녔다는 뜻이다. 스푼에 있었던 때를 생각하자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 생각나는 사람이 어째서 사사, 그 사람 하나 뿐일까. 예나 지금이나, 마음이 허할 때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변하지 않았다.


다음편 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송하는 현재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그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비록 배신자여도,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 정도는 해줘도 되겠지. 사사가 송하에게로 손을 뻗었다. 혹시나 자신인 것을 들킬까 싶어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어둠 속을 걷다 3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백모래는 가급적 송하에게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으려 했고, 송하가 맡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던 일은 대부분 오르카에게로 넘어갔다. 백모래도, 오르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송하는 자신이 짐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칼을 쓰는 일이라면 할 수 있다, 어렵지 않게 맡은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하자 백모래의 대답은 이랬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모르잖아. 눈도 안 보이면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그래."

 그 대답을 듣자 말문이 막혔다. 백모래는 헤실거리며 웃다가도 정곡을 찌르는 일이 잦았다. 백모래의 그런 성격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곡을 찔리는 쪽이 자신이 되니 기분이 과히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묘하게 서운한 감정을 느끼다가 이내 체념했다. 하긴, 이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밥 먹을 때 반찬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허둥대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벌써 며칠째, 본의 아니게 굶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그저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려니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자주 가던 공원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송하의 주된 일상이 되었다. 눈이 안 보이면서도 기어코 밖에 나가는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집안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다. 아무도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지만 송하 혼자 이렇지 않을까, 저렇지 않을까 하며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기도 전에 송하가 밖을 나섰다. 불어오는 바람이 봄바람답지 않게 차가웠다. 봄바람이면 살랑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오늘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렇게 바람에 신경을 쓰며 걷느라 앞에 뭔가가 있는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철퍼덕, 바닥에 손을 짚고 넘어지게 되었다. 상당히 흉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쌩쌩, 바람 소리를 내며 사라져갔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서 넘어진 건지, 어느 누구한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 송하가 답지 않게 허둥거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곁을 스쳐가던 바람 소리가 잦아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앞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앞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저 그렇게 바닥에 손을 짚고 있었다.

 넘어져도 왜 하필이면 자신의 앞에 넘어져 있는 것일까. 사사가 총을 꺼내서 송하를 겨누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와주느냐, 마느냐, 잠시 동안 고민에 빠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송하는 현재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그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비록 배신자여도,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 정도는 해줘도 되겠지. 사사가 송하에게로 손을 뻗었다. 혹시나 자신인 것을 들킬까 싶어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사사가 손을 내밀어 송하의 손을 잡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송하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잡은, 익숙한 온기에 잠시나마 예전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상은 자신도, 송하도 같이 있었던 시절과는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이들과 살아가고 있는 상태이지만. 송하를 일으켜세우자마자 사사가 손을 놓았다. 그 순간, 최면에 걸렸다 깨어난 것처럼 다시금 현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사사가 송하를 쳐다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배신자. 스푼과 나를 배신한 한없이 미운 사람. 송하를 내버려둔 채 사사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귓가에 들리는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애써 모른 척 했다. 너무 빨리 손을 놓아버린 탓에 혹시나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휘청거리지는 않았을까. 송하에게로 저절로 눈길이 가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그렇게 모질게 돌아섰지만 내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푼에 돌아와서도 자꾸만 송하 생각이 났다. 잘 들어갔을까.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왔던 곳으로 돌아갔을까. 그렇다고 해서 아직 널 용서한 것은 아니다. 넌 배신자임에 틀림이 없다. 오늘 널 공격하지 않았던 건 근처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였다. 괜한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을 뿐이다. 애써 변명거리를 생각해낸 사사가 송하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다음편 예고:


 그렇게 당당하던 송하가 바닥에 주저앉아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너는 이런 꼴을 보여주려고 스푼을, 나를 떠났던가. 잘 좀 살지. 이왕 떠났으면, 후에 서로에게 무기를 들이대는 날이 오더라도 그때까지는 당당하게 있을 것이지. 사사가 잠시 송하 쪽을 보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둠 속을 걷다 4


"오빠, 우리 같이 점심 안 먹을래?"
"아... 오느른..."
"저번에도 일이 있다고 하시더니, 오늘도 할 일이 있으신 거에요?"
"응."

 아쉽다는 얼굴을 한 채 사사를 보내주는 혜나와 나가를 보며 사사가 엷게 웃어주었다. 벌써 며칠째 사사는 점심 시간에 점심을 같이 먹자는 나가와 혜나의 제안을 마다하고 공원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곳에 가면 벤치에 앉아 있는 송하를 볼 수 있었다. 산책을 하기 위해 나온 공원에서 맨 처음 송하를 만났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사사는 또다시 공원에 발걸음을 했고, 어김없이 송하를 볼 수 있었다. 송하는 예전보다 야윈 것 같았지만, 표정만큼은 덤덤했다.

 생각보다는 슬퍼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답답해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사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할 것은 없었다. 배신자를 두고 그렇게 생각을 하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원래 남을 잘 미워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는 해도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제 성격이 무를 줄은 몰랐다. 자, 그렇다면 이제 어떡해야 하는 것일까. 당장 송하에게 달려들어 총으로 그 목숨을 위협해야 하나. 주머니에 넣어둔 총을 만지작거리며 사사가 송하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자신이 제 무기를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송하 역시 칼을 매만지고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표정 없는 얼굴로 칼을 만지는 모습이 송하답지 않게 퍽 처량해보였다.

 칼을 만지고 있던 손에 한순간 힘이 풀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디에 떨어진 것일까.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난 것으로 봐서는 이 근처에 떨어진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인데. 근처에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아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하긴, 사람이 있다고 해도 대놓고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원래부터 혼자 모든 것을 다 해내려고 하는 성격 탓에, 우물쭈물거리다가 입술조차 떼지 못했을 것이 뻔했다.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앉아 한참 동안 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모래알에 쓸린 손바닥이 쓰라렸다. 하지만 손바닥이 통증보다도 혹시나 칼을 못 찾을까 하는 걱정이 송하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당당하던 송하가 바닥에 주저앉아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너는 이런 꼴을 보여주려고 스푼을, 나를 떠났던가. 잘 좀 살지. 이왕 떠났으면, 후에 서로에게 무기를 들이대는 날이 오더라도 그때까지는 당당하게 있을 것이지. 사사가 잠시 송하 쪽을 보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리 벤치 근처를 손바닥으로 쓸어봐도 칼은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 무거운 칼이 바람에 날려가는 일은 일어날 리가 없을 것인데. 아니면 혹시나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홀랑 집어갔을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칼을 찾아야 했다. 오랜 친구도, 시력도 잃어버린 자신에게 남은 것은 검을 다루는 실력과 그 실력을 뒷받침해줄 칼 뿐이었다. 정말이지, 자신에게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력을 잃어버린 검사란 얼마나 쓸모 없는 존재인 것인지. 타고난 검술 실력이 있다고는 해도 그것만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얼마 안 가서 나이프에서도 내쳐지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아침부터 도망치듯 공원에 나오는 이유 중 한 가지가 그것이었다. 백모래가, 혹은 백모래의 말을 전달해주기 위해 온 오르카가 미안하지만 나이프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 라고 하지는 않을지. 아니, 순순히 자신을 보내줄 리는 없었다. 나이프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일지도 모른다는 편이 훨씬 신빙성이 있었다. 뭐가 어찌되었든 간에, 자신에게 썩 유쾌한 결말은 아니었다. 무섭다. 정말 무섭다.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사실도 무섭고, 어떤 결말이 다가올지 몰라 무서웠다.

 목을 조여오는, 숨이 막히는 현실 속에서 더없이 그리운 사람이 있었다. 마음 속에 꾹 눌러담은 채, 차마 추억을 들여다볼 수도 없어 모른 척 해왔던 사람. 사사, 당신은 이런 꼴을 하고 있는 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스푼을 배신하더니 참 꼴 좋다, 라고 할까요. 아니, 당신이라면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요.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어둠 속을 걷다 5


"우리 술래잡기 하자!"
"뭐라고요? 갑자기 무슨 술래잡기에요."
"하자, 응?"
"됐어요. 저리 가서 고양이들하고 놀아요."
"고양이들하고 술래잡기를 할 수는 없잖아!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하고 놀 사람은 없어?"

 많은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메두사와 오르카, 송하, 그리고 자신 뿐이었거늘. 아지트에서 자기와 함께 놀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백모래가 징징거렸다. 아이 같은 칭얼거림에 메두사가 제발 좀 그만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만하라는 말에 그만둘 백모래가 아니었다. 메두사한테 아예 달라붙어서 놀자, 놀자, 하고 몇 번을 반복한 끝에 승낙을 얻어냈다. 메두사는 몇 번 놀아주고 백모래를 떼어낼 심산으로 알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에서 저녁에 먹을 반찬을 뭘로 할지 궁리하고 있던 오르카도 얼떨결에 끌려왔다. 어느새 인원이 다 모였다며 백모래가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럼, 술래를 누구로 정해볼까?"

 백모래가 신이 나서 외치고 있었다. 술래잡기를 하면 거실이 난장판이 될 것이 뻔했으니, 방으로 가 있을 생각으로 송하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백모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모래가 지정한 술래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까지는 몇 분의 시간이 걸렸다. 비록 자신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상당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 

"처음 술래잡기는 송하가 술래!"

 메두사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 옆에 서 있던 오르카도 상당히 당황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송하의 팔을 붙잡고 어서 시작하자며 백모래가 해맑게 웃었다. 백모래의 웃음소리에는 묘한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백모래의 힘에 이끌려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서 거실 중앙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정말 자신을 술래를 시킬 참이었나, 하는 생각에 송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자신의 상태를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백모래의 생각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백모래는 매우 즐거워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 즐거움은 지금부터 할 놀이를 향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상태에 대한 것일까.

"송하를 시키면 어떡해요, 보스."
"뭐 어때? 어차피 술래가 되면 눈을 가려야 하는데, 송하는 그런 것도 필요 없고 좋잖아?"

 백모래가 하고 싶어하는 술래잡기는 술래의 눈을 가리고 박수소리에 의지한 채 다른 이들을 잡아내는 술래잡기였다. 어린 아이들이 흔히 하는 얼음땡이라든가, 그런 것들도 있는데 어째서 굳이 그 놀이를 하겠다는 것일까. 이런 놀이를 함으로써 눈이 보이지 않는 내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송하가 그건 아닐 거라며 부정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백모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기는 해도 제 부하의 마음을 후벼파는 사람은 아닐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건 좀..."
"왜? 별로야? ...하기 싫어, 송하?"

 오르카가 소심하게 그건 좀, 하고 말을 하자 백모래가 금세 입술을 삐죽였다. 놀이를 하자며 떼를 쓰는 모습도,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도 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 앞의 질문은 메두사와 오르카를 향한 것이었고, 하기 싫어? 하는 질문은 송하를 향한 것이었다. 송하가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나이프의 임무를 해낼 수 없다면, 이런 식으로라도 백모래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어떤 식으로라든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송하는 괜찮다고 하잖아. 술래잡기 하자!"
"괜찮다고 하는 게 진짜 괜찮은 걸로 보여요?"

 메두사가 난 안 할래요, 하며 거실을 나섰다.

"오르카, 다시 저녁 준비를 해도 될 것 같아."

 백모래와 메두사 사이에 끼여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오르카를 메두사는 단 한 마디로 그 속에서 빼내주었다.

"모두 하기 싫은 거야?"

 여전히 송하의 팔을 붙잡은 채 칭얼거리다가 백모래가 그 팔을 놓아주었다. 어느새 자신의 곁에 다가왔다가 멀리 물러나버리는 고양이를 억지로 붙들어 안아 올리며 백모래가 중얼거렸다.

"모두 안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근데, 참 신기하네. 진짜로 안 보인다니."

 그 말을 남긴 채 백모래가 자리를 떴다. 참 신기하네, 진짜로 안 보인다니, 하는 말이 왠지 섬뜩하게 들렸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투로 들리기까지 했다. 검을 다루기 위해서는 시력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보이지 않는다며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백모래의 말 뜻을 짐작하기를 포기한 송하가 그 근처를 더듬거리며 앉을 곳을 찾았다. 백모래가 설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닐 것이었다. 예민해진 기분 탓에 괜히 상처 받을 생각만 골라하고 있는 자신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밑바닥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둠 속을 걷다 6


 그곳에 가면 언제나 그를 볼 수 있다. 오늘도 있으려나, 아니, 있을 테지. 사사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제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은 송하가 옆으로 살짝 몸을 움직였다. 제가 비켜준 자리에 누군가가 앉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존재이지만 언젠가부터 비슷한 시간대에 오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옆에 앉으라는 뜻으로 자리를 비켜주면 거부하지 않고 그곳에 앉아 휑하던 제 옆을 채워주었다. 오래 전, 말없이 자신의 옆자리를 채우고 있던 사람의 기척과 비슷해 가끔씩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자신은 아직 스푼 사원이고, 제 옆에 있는 사람은 사사인 것 같은, 그런 아득하고도 멋 옛날의 일. 사사,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송하를 멀찍이 떨어져서 보다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사사가 송하의 손가락에 감긴 밴드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저번주였나, 앞이 보이지도 않으면서, 장난처럼 검을 휘두르던 습관이 남아 있었는지 칼을 뽑아들고 몇 번 휘두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동작은 한없이 가벼워보이면서도 상당히 재빨라서 보는 사람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아직 실력은 죽지 않았구나, 하고 감탄을 했는데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오른손에 든 칼로 자신도 모르게 왼쪽 손을 스치는 모습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대충 옷자락에 닦아내는 모습이, 그 덤덤한 모습이 싫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약국 앞에 서 있더랬다. 들어갈까 말까, 몇 번을 망설였다. 고작 손을 다쳤을 뿐인 것을. 손을 다친 적을 위해 약국에까지 달려오다니, 내가 이상해진 게지. 알아서 하겠지. 알아서 치료를 할 거라고 애써 생각을 해보았지만 약국 앞에 선 채 발걸음을 떼지를 못했다. 송하라면 그 손을 치료조차 하지 않고 내버려둘 것 같았다. ...갈색 피부의, 약간 거칠기는 해도 정갈해보이는 그 손이 참 좋았었는데.

 결국에는 밴드 한 통을 사들고 송하 쪽으로 걸음을 하게 되었다. 덥석 손을 잡자 손을 빼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몸짓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사가 송하의 손에 기어코 밴드를 덕지덕지 붙여 놓았다. 사실은 붕대와 소독약을 사오고 싶었지만, 그건 아무리 봐도 이상해보일 것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밴드를 사왔다는 상황은 누가 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사온 것이 밴드였다. 통 안에 든 밴드를 거의 반 이상을 쓴 후에야 사사가 송하의 손을 놓아주었다. 밴드가 꼼꼼하게 붙여졌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톡톡 두드려보기까지 했다. 남은 밴드는 너 가지라는 뜻으로 살며시 송하의 오른손에 쥐어 주었다. 혹시라도 또 다치게 되면, 참지 말고 이거라도 이용하길. 오랜만에 받아보는 타인의 보살핌에 송하는 어색해 몸둘 바를 몰랐다. 너무도 오랜만에 받아보는 배려 때문에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을 잊어버릴 뻔했다. 제 손에 쥐어진 밴드 통을 붙들고서 입을 열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어색한 말투로 감사하다며 송하가 말을 건넸다. 제 옆에 앉으라는 듯이 몸을 옆으로 움직이길래 자신도 모르게 그곳에 앉게 되었다. 불안한 얼굴로, 혹시나 몸이 닿을까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기는 했지만 잠시나마 옛날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와 함께 휴식을 즐기는 것 같은, 달콤하면서도 쓰디쓴 착각. 그 착각이 진짜라면 좋을텐데.

 그날 이후, 송하를 공격하겠다는 마음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 그래, 인정하자. 나는 더이상 그를 공격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히어로로서, 비록 옛 동료이긴 하지만 지금은 적이 되어버린 자를 어째서 공격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해서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사사가 제 옆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는 송하를 쳐다 보았다. 송하, 솔직히, 이제는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불쑥 밀려오는 죄책감에 주머니에 넣어둔 총에 손을 갖다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번번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게 되는 이유는, 그 눈동자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초록색의 눈동자. 이제는 더이상 앞을 볼 수가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송하의 눈은 제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빛을 보지는 못하더라도, 눈동자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이리저리 헤매던 시선이 어쩌다가 자신 쪽을 향하기라도 하면 손의 힘이 풀리곤 했다. 참 멍청하고, 바보 같지. 우리가 적이 된 지금에서까지 어째서 나는 아직도 네게 휘둘리고 있는 것인지.

 
다음편 예고:


"사사."

 참으로 어이 없게도, 그동안 그토록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들켜버렸다.

"사사 맞습니까."


어둠 속을 걷다 7


 습관처럼 찾은 공원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송하는 언제나처럼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고, 곁에는 몇몇 아이들이 달라붙어있었다.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중인가. 아니, 결코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이들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기묘한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의 대상은 송하임에 틀림이 없었다. 송하는 제게 달라붙은 아이들에 둘러싸여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대체로 순진하고, 반짝인다. 하지만 때때로 그들이 보여주는 잔인한 모습은 주변인들을 섬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던지는 잔인한 질문에 송하는 몇 번이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질문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되어 송하를 겨누었다.

"정말 눈이 안 보여요?"
"봐봐, 내가 그랬잖아. 이 사람, 진짜로 눈이 안 보인다고."
"와, 신기하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원래부터 그런 거에요?"
"지금 내가 손가락을 몇 개 펼쳐들고 있게요?"

 당황한 송하가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일어섰다. 오늘은 늘 제 곁에 앉아있어주던 사람이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 대신 순진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지닌 아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송하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송하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의해 넘어질 뻔했던 그를 누군가가 붙들어주었다. 아이들의 눈길은 송하를 붙든 사사에게 향했다. 그들은 일제히 사사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어, 그 쪽은 누구에요? 이 사람 친구에요?"
"잘 됐다, 그러면 대답 좀 해주세요. 이 사람은 원래부터 이랬어요?"
"이 쪽은 눈이 안 보이고, 그 쪽은 말을 못 하는 거에요?"

 원체 화를 잘 안 내는 사사였지만 이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들은 순진하다. 하지만 동시에 잔인하기도 했다. 지금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한없이 잔인한 면모였다. 대충 손을 휘저으며 가라는 시늉을 하고 있는 사사를 향해 아이들이 제각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근데,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날개를 봐, 까맣잖아.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악마는 날개가 까맣댔어."
"보니까 눈도 까맣고, 머리카락도 까맣고, 날개도 까매. 진짜 악마인가?"

 날개가 있다, 까만 날개가. 눈도, 머리카락도 까맣다. 아이들의 묘사를 들은 송하의 몸이 굳었다. 설마 제 옆에 있는 사람은 사사인 것일까. 제 손에 붙들린 송하가 굳은 것을 느낀 사사는 아차 싶었다. 아이들은 구체적으로 사사를 묘사하기 시작했고, 송하는 이제 의심이 아니라 확신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사사가 맞았다.

"사사."

 참으로 어이 없게도, 그동안 그토록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들켜버렸다. 그동안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들키게 되다니. 당황해서 손을 내젓던 행동을 멈추고 있던 사사가 이윽고 다른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일단 몰려든 아이들한테서부터 벗어나서 얘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쫓아올 것 같았는데, 다른 재밌는 것을 찾은 건지 아이들은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 사사가 걸음을 멈추자 송하 역시 따라서 걷는 것을 멈추었다. 사사. 다 알고 있지만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송하가 설마, 싶은 심정으로 질문을 했다.

"사사 맞습니까."
"...응."

 이제 와서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봐야 무엇하나. 사사는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고, 그동안 제 옆에 있어온 사람이 사사였다는 것에 대해 송하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저 역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 맞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대로 공격을 해야 할까. 마음보다도 몸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검을 칼집에서 빼내려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예전에는 절대 안 하던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고, 검은 칼집에 넣어진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칼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인 송하보다 사사의 동작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칼을 집어든 사사가 다른 손으로 송하의 팔을 잡았다. 그동안 많이 야위었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될 정도인 줄은 몰랐다. 칼을 떨어뜨리다니, 그 잘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송하가 그런 실수를 하다니. 칼을 다뤄본 적이 없는 사사 자신도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송하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영양 보충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송하를 붙잡은 그대로 사사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음식점들 중에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던 사사가 근처 국밥집에 들어섰다. 왜 하필이면 국밥집을 선택했나 묻는다면, 눈이 안 보이는 송하한테는 그것이 가장 편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젓가락질을 해야 하는 국숫집이나 수많은 반찬이 나오는 음식점은 송하에게 한없이 불편한 곳일 터. 숟가락질 한 번으로 음식을 떠먹을 수 있는 국밥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붙잡은 사사의 팔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송하였지만 이렇게 무작정 따라갈 수는 없었다. 안 가겠다고 뻗대다가 사사가 던진 한 마디에 머뭇거리게 되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어디로 가면?"

 어디로 가면, 네가 어떡할 거야? 여기서 사사가 자신의 손을 놓아버린다면, 왔던 곳으로 혼자서는 어떻게 돌아갈 방도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칼은 사사의 손에 있으니, 도망을 친다고 해도 칼이 없는 한 떳떳하게 나이프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체념한 송하가 얌전히 사사를 따랐다. 아까와는 달리 자신을 따라 걷고 있는 송하를 사사가 힐끔 쳐다보았다. 사실은 그것마저도 염두에 두고 물은 질문이었다. 송하의 칼은 자신에게 있었고, 눈이 안 보이니 어떻게 돌아갈 수도 없겠지. 사사는 송하를 어렵지 않게 식당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멋지게 싸움을 벌이는 대신 둘은 가운데에 테이블을 두고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벽에 붙은 메뉴들을 쳐다보며 사사가 입을 열었다.

"여디는 머가 있냐면."

 지금 우리가 온 곳은 국밥집이야. 여기는 뭐가 있냐면, 도가니탕이 있고, 소머리 국밥이 있고. 메뉴들을 하나하나 읊어주는 사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송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는 자신이 사사 대신 주문을 하고, 말을 했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은 모두 자신의 몫이었건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 하시겠어요? 하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까지 사사한테서 들은 메뉴들을 토대로 송하가 음식을 주문했다.

"소머리 국밥으로 하겠습니다."
"음식은 하나만 시키실 건가요?"

 그 질문은 사사에게 던져진 것이었고, 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음식이 나오고, 송하는 맛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송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색하게 숟가락질을 하고 있는 송하를 사사가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러고보니 상당히 수척해져 있었다. 그런 주제에 칼을 들고 공격을 할 생각을 하다니. 하려면 잘 좀 할 것이지, 그런 모습을 보여서 사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면 어떡하나.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식사를 마친 후 둘은 다시 공원으로 오게 되었다. 자, 하고 제 손에 다시 들려진 칼을 받아들이려다가 말고 송하가 말을 했다.

"지금 이대로 사사를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것을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사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아라."
"차라리 이대로 스푼으로 끌고 가는 것이 사사한테 이득일텐데요."

 그것도, 알고 있다.

"어째서 그러지 않는 겁니까."

 그러게, 어째서 그러지 못하는 것일까. 잠시 머뭇거리던 사사가 조용히 대답을 해왔다. 바보 같이, 옛정이 남아서. 제대로 칼을 잡지도 못하는 모습에 기분이 이상해서. 그 대답에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은 송하였다.  뭐가 어찌되었든 간에, 다음에 만나면 네게 총을 들이댈 거야. 붙잡고 있던 칼에서 손을 뗀 사사가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사는 그 후로 공원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송하를 본다면 그때는 정말 공격을 해야 할 테니. 송하 역시 공원을 찾는 것을 그만두었다. 혹시나 사사를 만날까 싶어서, 사사가 치료해준 손으로 칼을 들이대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 달갑지 않아서.


다음편 예고:


"송하, 그거 알아?"
"뭘 말씀하시는 건지..."
"네 눈빛, 죽어 있어."
 
 예전에는 빛났는데. 이걸 뭐라고 하더라, 썩은 동태 눈깔이라고 하나. 아무튼, 안 됐다, 진짜로.

 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죽었대. 눈빛이 죽어있대. 사사가 보기에도 그랬으려나. 내가 그렇게 불쌍해보였나, 그래서 그날 나를 죽이지 않고 보낸 건가.


어둠 속을 걷다 8


 아마도 창문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쪽으로 송하가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날씨가 어떠려나. 세찬 바람 소리나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는 않을까 싶어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밖에 나가지 않은지 꽤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허한 기분이 들었다. 밖에 나가 있기라도 하면 그나마 괜찮은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갈 곳은 공원 뿐이었고, 이제는 그마저도 스스로 발길을 끊은 참이었다.

 심심해, 아, 진짜 심심하다. 주위 사람 들으란 듯이 크게 외치던 백모래가 송하에게 다가갔다. 이제부터 수다를 떨 생각이었는지 송하를 붙들고 아무 말이나 던지고 있었다. 수다의 주제는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랩터가 되기도 했고, 고양이가 되기도 했고, 내일 아침 식사 메뉴가 되기도 했다. 송하의 눈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던 백모래가 신기한 듯이 송하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마치, 빛을 잃은 초록색 공 같았다.

"그런데 송하, 눈이 안 보이는 기분은 어때?"

 느닷없이 던져진 질문에 송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입을 열어 겨우 대답을 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불편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멀쩡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이렇게 된 걸 보면."

 백모래는 저 하고 싶은 말을 아무렇게나 툭툭 내뱉기 시작했다. 그 말에 상처를 입어야 하는 것은 송하였다. 유달리 충성심이 강한 송하였기에 묵묵히 백모래가 던지는 말들을 참아내고 있었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진이 빠지고 있었다.

"송하, 그거 알아?"
"뭘 말씀하시는 건지..."
"네 눈빛, 죽어 있어."

 예전에는 빛났는데. 이걸 뭐라고 하더라, 썩은 동태 눈깔이라고 하나. 아무튼, 안 됐다, 진짜로. 그 다음에 백모래가 하는 말은 송하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의미 없는 소음이 되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눈빛이 죽어 있어, 안타깝다. 이 말만이 반복해서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백모래가 뱉어낸 말들에 상처를 입었건만, 백모래는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날린 셈이었다. 이대로 백모래의 나머지 말들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며칠동안 스스로 바깥 출입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나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가봤자 갈 곳은 딱 한 곳 뿐이었다. 공원. 그곳에 가서 사사를 만나든, 싸우든 간에 이곳에서 백모래와 마주하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송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나섰다. 오랜만에 맞는 바람이 송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겨우 도착한 공원에는, 송하는 몰랐지만, 사사가 있었다. 송하를 본 사사가 머뭇거리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저번에 한 말, 다음에 만나면 네게 총을 들이댈 거야, 라는 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상기해내면서. 또한, 히어로로서 적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송하의 중얼거림이 사사의 귀에 들려오는 순간 총을 쥔 손의 힘을 풀 수 밖에 없었다. 그토록 표정 한 번 변하지 않던 송하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죽었대. 눈빛이 죽어있대. 사사가 보기에도 그랬으려나. 내가 그렇게 불쌍해보였나, 그래서 그날 나를 죽이지 않고 보낸 건가.

 송하, 하고 저도 모르게 부르고 말았다. 놀랍게도 송하가 그 부름에 대답을 했다. 대답을 한 것 뿐만 아니라 질문까지 던져오고 있었다.

"사사, 말해주십시오. 제 눈이 정말 그래보였습니까?"

 저도 이렇게 되기는 싫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동안 애써 참아왔던 불안감이며, 두려움을 한순간에 폭발시키듯 송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울 것처럼 입술을 깨물던 송하가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눈에서는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우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울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울어본 적이 거의 없는 송하로서는 이 감정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기묘한 표정을 보던 사사가 결국 총을 내려 놓았다. 울어, 울고 싶으면 울어. 송하의 곁에 쪼그려 앉은 사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예전만큼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는 아니어도 그 말은 촉진제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송하가 사사를 붙들고 서툴게나마 제 감정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팔을 붙든 채 울고 있는 송하의 등을 쓸어주며 사사가 송하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주었다.


다음편 예고:


"다음에 만나면 제게 총을 들이댈거라고 했지요. 우리는 이렇게 또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절 죽일 겁니까?"
"...아니."
"어째서입니까?"


어둠 속을 걷다 9


 사사도, 송하도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앉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눈물은 멎은지 오래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송하였다.

"다음에 만나면 제게 총을 들이댈거라고 했지요. 우리는 이렇게 또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절 죽일 겁니까?"

 사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비록 송하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에게는 그럴 뜻이 없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아니."
"어째서입니까?"

 그 이유는 자신조차도 파악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옛 친구로서의 정이 남아 있어서? 그걸로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었다. 송하를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는 것, 싸우기가 겁이 난다는 것. 사사가 내놓은 타협안은 이것이었다. 스푼과 나이프의 싸움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싸우지 않겠다. 거리에서 대놓고 널 죽이고 싶지도 않고, 스푼으로 끌고 가는 것도 싫다. 사실은 너랑은 싸우고 싶지 않다는 것을 내포한, 최대한 에둘러 한 말이었다. 그 뜻을 송하 역시 짐작하고 있었기에 더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휴전 협정이 내려졌다고 봐도 좋았다.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도 아닌 상태였다.

"왜 지금까지 저를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보이지도 않으니 제압하는 건 쉬웠을텐데 말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으니까. 방금 사사가 내놓은 타협안에 반하는 질문이었고, 사사가 대답을 한 후에야 송하는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군요."
"응."

 사사와 헤어지고 난 후 송하가 밖을 나서기 전까지는 무거웠던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위안이 되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비록 지금은 어느 쪽이라고 단정 짓기 어렵기는 해도, 한때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다소나마 제 편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은 송하에게 상당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이 상황에서 사사에게 기대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기대고 싶을 만큼 자신은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써주지 않고, 하루하루 불안감을 억누르며 살아가고 있던 도중 사사는 제게 찾아온 하나의 구원과도 같았다.

 며칠이 지난 후 오늘도 심심하다며 백모래는 자신의 무료함을 해소해 줄 대상으로 송하를 골랐다. 대화의 주제가 이리저리 오고 간 끝에 백모래가 선택한 것은 역시나 송하의 눈에 관한 것이었다.

"진짜 안 보이는 거지? 거짓말 하는 거 아니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송하의 대답에 백모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네, 정말 그렇겠네. 백모래는 유독 자신의 눈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마치 저번에 공원에서 만났던 아이들같았다. 천진함을 가장한 잔인함을 백모래 역시 보여주고 있었다. 아, 그것과는 좀 다른 건가. 이 쪽은 다 큰 성인이고, 그 쪽은 어린 아이들이었으니. 그러나 양측 모두 제게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백모래가 몇 번이고 송하의 눈 상태에 대해 질문을 했다. 묘하게 발랄한 말투로 던지는 질문에 송하는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 대답을 들려주었다. 말투에 섞인 경쾌함과 즐거움에 몇 번이고 가슴에 칼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보스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 것일까. 뭐가 그를 이렇게 신이 난 말투로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자신의 상태를 지루한 일상에 일어난 하나의 사소한 사건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식탁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메두사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오르카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보스, 무슨 좋은 얘기라도 하나? 송하랑 얘기하는데 계속 웃고 있던데."
"보스가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몰라. 하여간 좋겠어, 저렇게 즐거워서."

 아마 보스가 이 아지트에서 제일 즐거운 사람일 거야. 누구는 이 촌구석에서 쇼핑 한 번 제대로 못해서 말라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지. 메두사의 투덜거림에 오르카가 그거 안 됐다며 서툰 위로를 건넸다.


어둠 속을 걷다 10


"오빠, 무슨 생각 해?"
"...아무거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하고 혜나가 중얼거렸다. 사사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은 무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할 때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혜나의 중얼거림은 사사에게 가 닿지 않았다. 선배한테 무슨 생각할 일이 있나보지, 하고 나가가 혜나를 붙들었다. 이것 좀 놓으라며, 사사가 고민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해야 하지 않겠냐고 외치는 혜나를 염력을 이용해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당사자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모르는 척 놔두는 게 좋은 거야. 그 말을 들은 혜나가 그런 거야? 하고 되물었다. 응, 그런 거야, 하고 대답해주니 그제서야 얌전하게 발을 까딱거렸다. 가끔 보면 혜나는 시한폭탄 같았다. 서장님 동생이라서 그런가. 사사가 깊이 생각에 빠질수록 진땀을 빼야 하는 것은 나가였다. 사사를 이렇게까지 생각에 잠기게 만든 문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그 문제가 해결되길 바랬다.

 턱을 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스푼과 나이프의 싸움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싸우지 않겠다니. 어째서 불쑥 그런 말을 해버린 것일까. 히어로의 본분을 다 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사사를 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송하와 싸우고 싶지 않다는 마음 역시 진심이었다. 단순히 정 때문이었을까. 정 같은 것이라면 이미 오래 전에 잘라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정 때문이라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 뭔가가 무엇인지 선뜻 알아내기가 두려웠다. 자신이 감당해내지 못할, 제 팀원들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할 무언가일까봐. 공원으로 가지만 않는다면 송하와 마주치는 일은 없다. 오늘은, 오늘만이라도 공원으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매번 그 결심이 무너졌다. 점심 시간만 되면 공원으로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 오늘도 송하는 공원에 있었고, 그 모습을 보자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왔습니까."

 송하, 하고 부르기도 전에 송하가 사사에게 말을 걸었다. 응, 하고 사사가 대답을 했다. 어떻게 된 게 단 한 번도 먼저 송하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먼저 송하가 저를 불렀다. 눈이 보였을 때도 주위에 퍽 예민하게 반응을 하던 송하였지만 지금은 더욱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송하의 곁에 앉으며 사사가 물었다.

"오느른 머하고 이써떠?"
"그냥 이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둘 사이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송하의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지나간 바람은 이어서 사사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문득 송하의 옷차림에 시선이 갔다. 와이셔츠에 조끼라니, 저렇게 입으면 안 춥나.

 둘 사이에 애매한 휴전 협정이 맺어진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송하로서는 그나마 세상이 살 만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습게도,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적한테서 위로를 얻는다, 그리고 위안을 받는다, 라. 예전의 자신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이건 위험한 상황이라고 아무리 자신을 채찍질해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의 자신에게 남은 것이 대체 무엇이 있나. 이 위태로운 휴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젠가 사사가 그 휴전 협정을 깨고 자신의 머리에 총을 들이댈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신은 그에 대한 답으로 칼을 휘둘러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숨을 쉬고 싶었다. 나이프 아지트에서 내뱉는 불안스러운 숨이 아닌, 다소나마 마음이 편한 그런 숨을.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는 송하를 보다가 사사가 눈길을 거두었다. 너는 불안하지도 않은가 보았다. 제 곁에 있는 사람이 언제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평온한 얼굴을 할 수가 있다니. 아니면 너는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일까. 언제 끝이 다가올지 모르는 이 불안한 상황을. 문득 송하가 눈을 떴다. 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할까 싶어 사사가 부러 고개를 먼 곳으로 돌렸다. 그 눈만 보면 언제나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편 예고:


 꿈을 꾸었다. 시력이 돌아오는 꿈을. 아주 오랜만에 보는 사사의 얼굴이 반가웠다. 적이라고 할 수도, 친구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존재는 여전히 자신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어둠 속을 걷다 11

 
 송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직 새벽인 건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햇살은 느껴지지 않았다. 햇빛 대신 어둠이 송하를 맞아주었다. 몸을 웅크린 채 아까의 꿈에 대해 생각했다. 꿈이었지만 꿈이지 않길 바랬던 그 허상을.

 꿈을 꾸었다. 시력이 돌아오는 꿈을. 아주 오랜만에 보는 사사의 얼굴이 반가웠다. 이마를 다 가린 앞머리를 만지며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휘어지는 눈꼬리가, 그 눈빛이 좋았다. 이제는 적이라고 할 수도, 친구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존재는 여전히 자신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자꾸만 헷갈렸다. 자신이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눈이 보이던 때인지, 아니면 사사와 함께 있던 때인 건지. 사사와 함께 있던 시절을 그리워하다니, 옛날에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해졌던가. 스푼과 나이프, 둘 모두에 마음을 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온 것 같았다. 이 어중간한 마음을 어떡해야 할까. 사사를 만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공원으로 가지 않는다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리고 자신은 언제나처럼 나이프의 일원으로서 행동을 하면 될 일이었다.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 안 된다.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마음 탓에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상처를 입는 것은 자신이 될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제 자신을 몰아붙여봐도 아침마다 공원을 찾게 되고야 말았다. 그 곳에서 사사를 기다리게 되었다. 햇살이 강렬해지는 오후에는 언제나 사사가 자신을 찾아왔다. 그 강렬한 햇살 속의 오후는 자신에게 꿈 같은 시간이 되어주었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옆자리를 채워주는 온기에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았다. 아, 오늘도 와주었구나. 송하가 입을 열어 사사를 부르려다가 그만두었다. 저번부터 계속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하지만 매번 용기를 내지 못해 묻지를 못했다. 제 눈빛이 정말 죽어 있습니까. 더이상 예전 같지 않은 겁니까. 내 기억 속의 당신은 더없이 좋은 눈빛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의 저는 사사에게 어떤 느낌을 주고 있습니까.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송하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사, 제 눈빛이 정말 죽어버린 것처럼 보입니까."

 뜬금없는 물음에 사사가 송하를 보았다. 송하가 자신의 눈길을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을 잠시 잊은 채였다. 대답 없는 사사를 두고 송하가 변명을 하듯, 답지 않게 어물거렸다.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예전처럼 앞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보기에 썩 좋지는 않겠지요. 다시 마주친다면 총을 들이댈거라는 말에 공원을 찾는 것을 그만두었더랬다. 그러나 자신은 백모래의 무심한 말에 그 자리를 뛰쳐나와 또 한 번 사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제 눈이 정말 그래보였습니까, 하는 물음에 사사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다.

"아니."

 그 대답에 맥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과연 사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 함부로 막말을 하지 않는 사사였으니 제게 그렇게 말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위로 안 해줘도 됩니다."

 진짜로 그런데, 하고 사사가 대답했다. 서툰 위로 같은 것이 아니었다. 초점을 맞추지 못해 흔들리는 시선에서조차도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랬다. 항상 그래왔다. 송하는 지금도 여전히, 옛날과 똑같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 눈빛에 반응하게 되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그 눈과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예전처럼, 둘이 같이 있던 그때처럼. 사사가 그 말을 꺼내자 송하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그렇게는 못 한다는 거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은 저도 그러고 싶었다. 어젯밤의 꿈처럼 사사를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시력이 돌아온다는 믿음을 가질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할 수 있어. 내가 네 얼굴을 붙잡고 너는 딱 정면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시선을 주면 돼. 비록 네가 직접 보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볼 수 있으니까 괜찮아. 그 말에 송하가 아주 작게 웃었다. 사사의 생각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승낙의 뜻으로 송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이어 자신의 얼굴을 붙든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더없이 오랜만에 마주한 초록색 눈동자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아주 오래 전부터 송하를 좋아해왔을지도 몰랐다. 이제껏 총을 쏘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다. 아직까지도 송하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동시에 야속함이 밀려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나이프에 간 것인지 묻고 싶었다. 계속해서 내 옆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만약 그랬다면 이리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이렇게 되었더라도 내가 계속해서 챙겨줄 수 있었을 텐데.


어둠 속을 걷다 12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된 거지? 맨 처음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때 어땠는지 생각나? 마지막으로 눈이 보였을 때 넌 그날 뭘 하고 있었어? 혹시나 송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될까 싶어 사사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건드리기에 민감한 주제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쩌면 눈이 멀게 된 원인을 파악해내고 다시 시력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무래도 나이프 일원들은 송하를 도와줄 것 같지가 않으니 자신이라도 원인 파악에 나서보겠다는 마음으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평소하고 다르지 않게 하루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틀림없이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거라는 사사의 말에 송하가 애써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눈이 안 보이게 된지도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앞을 볼 수 있었던 날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날 자신이 무엇을 했었던가. 사사의 말대로 평소와는 다른 일이 있었을까? 다른 때보다 흐릿해진 시야에 비쳤던 아지트 가득한 고양이들, 쇼파에 앉아 무료한 얼굴을 하고 있던 메두사, 그리고 백모래의 실없는 웃음. 수련을 하고 돌아온 뒤 백모래의 부탁에 고양이를 돌보고, 먹을 것을 먹고, 마실 것을 마신 그저 평범한 하루. 전혀 짚이는 점이 없었다. 송하가 고개를 젓자 사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없다면 없는 거겠지.

"...그래."

 아지트로 돌아가는 내내 송하가 그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날은 평범한 하루였다는 사실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송하, 고양이 좀 돌봐줘.'
'먹이만 주면 되는 겁니까?'
'응.'

 고양이 사료를 자신에게 쥐어주는 백모래의 모습 뒤로 보이는 메두사와 오르카의 모습.

'진짜 심심해죽겠네.'
'메두사 님, 저번에 사온 디비디는 어쩌시고...'
'그거 사온지가 언젠데, 벌써 다 봤지.'
'고양이 돌보느라 수고했어. 자, 마셔.'
'감사합니다. ...냄새가 독특하군요.'
'그렇지? 메두사가 요즘 즐겨 마시는 쥬스라던데 냄새가 좀 그렇긴 해.'
'그게 냄새가 어떻다고요? 그리고, 쥬스가 언제 이렇게 줄었나 했더니, 보스가 다 마신 거에요? 이거 사러 나가기 귀찮단 말이에요!'
'어차피 메두사가 직접 가는 게 아니라 오르카한테 시키는 거면서!'

 백모래, 메두사, 오르카,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섞였다. 왁자지껄했던,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 줄은 몰랐던 그날.

 아지트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지트 출입문이 대충 여기쯤에 있을 거라고 짐작한 송하가 손을 뻗었다. 문고리가 여기 어디쯤에 있을텐데. 손으로 문을 더듬자 곧이어 문고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 이제는 사사의 목소리보다도 더 익숙해진 나이프 일원들의 목소리들이 들렸다.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온전히 마음을 줄 수 없는 그들의 목소리. 사사와 있었던 몇 분 전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다 흠칫했다. 지금은 저들이 자신의 동료였고, 사사야말로 적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완벽하게 적 혹은 아군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피로감이 느껴졌다. 대체 어디에 마음을 붙여야 할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음을 붙여야 할 곳은 현재 소속 되어 있는 곳이라고. 그러나 마음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불안한 마음은 백모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더욱 강해졌다.

"오늘은 좀 늦었네?"
"아, 네. 조금 늦었습니다."
"오르카가 지금 저녁 하고 있으니까 같이 밥을 먹을 순 있겠다."
"그거 다행이군요."

 정신 차리자. 이곳이 바로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곳이었고, 마음을 붙여야 할 곳이었다. 다른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되었다.


어둠 속을 걷다 13


 따분해하는 메두사에게 그러면 모두 같이 영화라도 볼까, 하고 백모래가 제안을 했다. 이제까지 반복해서 본 영화가 몇 개인 줄이나 아냐며, 이제는 대사도 다 외울 지경이라는 말에 백모래가 반박했다.

"혼자 보는 거하고 같이 보는 거하고는 다르지! 거실의 불을 끄고 다 같이 공포영화를 보면 느낌이 다를 거야."
"그건 좀 괜찮게 들리네요. 근데."

 모두의 눈길이 자신에게로 꽂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송하도 같이 보면 되지. 아니면 내가 영화 내용을 설명해줄 수도 있고."

 자기 딴에는 송하를 왕따 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은 건지 백모래가 송하 대신 대답을 했다. 송하 역시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장면을 봐야 이해가 가는, 두뇌게임을 요구하는 영화도 아니고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뭔가가 튀어나오는 것이 대부분임을 모르지 않았다. 공포영화는 어차피 거기서 거기일 테니, 보지 않고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비명을 지르고 뭔가에 찔리는 소리가 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측이 가능했다. 영화 내용을 설명해주겠다고 자청했던 백모래는 어느새 입을 다물고 영화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이 일도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백모래에게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백모래에게 뭐라고 할 처지도 아니었지만은. 곁에서 연신 으, 으, 하고 신음을 내뱉던 백모래의 목소리가 차차 잦아들었다. 이제 영화가 끝난 것인지 음산한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내내 숨죽여 영화를 보고 있던 오르카가 중얼거렸다.

"정말 무섭군요.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집이었는데 저렇게 바뀐다고 생각하면..."
"그치? 몇 번을 돌려봐도 그 장면은 소름이 끼친다니까. 설마 그때 열어봤던 상자 안에서 안 보이는 무언가가 튀어나왔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고작 상자 하나를 열어봤다고 저런 일이 벌어지게 될 줄은 누구도 짐작을 못 했을 것 같네요."
"내 말이. 아주 사소한 일이었을 뿐인데 말이야."

 오르카와 메두사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백모래가 끼어 들었다.

"사실은 그게 가장 위험한 거 아니야? 일상의 배제라는 게. 평소하고는 다른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잖아. 그 일이 뭔가를 바꿔놨을지 어떻게 알아."

 설령 그 일이 아주 사소한 거였더라도 말이야. 덧붙인 말이 의미심장했다. 백모래는 아무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겠지만, 자신은 그 말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현재 자신의 상황과 정확히 맞물리는 말이었기 때문에. 몇 번이고 그날을, 그때 했던 행동을 되짚어보았다.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나? 혹은 평소처럼 행동했던 것에 자연스럽지 않은 무언가가 섞여 있었던가?

'송하, 고양이 좀 돌봐줘.'
'먹이만 주면 되는 겁니까?'
'응.'

 고양이 사료를 자신에게 쥐어주는 백모래의 모습 뒤로 보이는 메두사와 오르카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진짜 심심해죽겠네.'
'메두사 님, 저번에 사온 디비디는 어쩌시고...'
'그거 사온지가 언젠데, 벌써 다 봤지.'

 손질한 손톱을 매만지던 메두사와 어떻게든 뭔가 할 것을 찾아내주려던 오르카.

'고양이 돌보느라 수고했어. 자, 마셔.'
'감사합니다. ...냄새가 독특하군요.'
'그렇지? 메두사가 요즘 즐겨 마시는 쥬스라던데 냄새가 좀 그렇긴 해.'
'그게 냄새가 어떻다고요? 그리고, 쥬스가 언제 이렇게 줄었나 했더니, 보스가 다 마신 거에요? 이거 사러 나가기 귀찮단 말이에요!'

 메두사가 요즘 즐겨 마시는 쥬스라며, 고양이를 돌보느라 수고했으니 마시라고 하며 백모래가 건네주었던 머그컵. 잔 안에 들어 있던 주황색 액체. 반쯤 빈 쥬스병을 흔든 후 백모래의 어깨를 잡아챈 메두사. 맞을 것임을 짐작했는지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쥔 뒤 항변하는 백모래.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몰라 쩔쩔매던 오르카.

'어차피 메두사가 직접 가는 게 아니라 오르카한테 시키는 거면서!'

 백모래의 말을 마지막으로 그날의 기억은 여기서 끝났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희미해져가는 기억들을 더듬어보려니 머리만 아팠다. 조금 더 먼 기억들을 더듬어봐야 하려나. 그날 아침이, 혹은 그 전날의 저녁이 문제였을까. 그날 아침, 수련을 가기 위해 나서던 자신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던 오르카가 떠올랐고, 자신의 발치에 머물던 검은 색 고양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송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네."
"영화 재밌었지?"

 가벼운 웃음을 실은 목소리를 들으며 송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질문을 그렇게 해요? 그리고 송하한테 영화 설명해준다더니 하나도 안 해줬죠?"
"아, 잊고 있었어."

 메두사의 비난과 송하 미안, 하는 사과가 들렸다. 그러나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괜찮습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송하의 목소리는 메두사에게 맞을까봐 저 멀리 달아난 백모래에게 닿지 않았다.


어둠 속을 걷다 14


"송하, 힘들어? 눈이 안 보이는 채로 사는 거?"

 힘들어도 힘들다고 쉽게 말을 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제 속마음과는 달리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대답, 건조한 말투. 사사 외에는 아무도 그 안의 숨은 의미를 파악해내려 애쓰지 않았던 자신 특유의 말투에 백모래는 간단히 대답을 해주었다.

"예전보다는 좀 그렇지만, 어떻게든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송하는 강하니까 괜찮을 거야."

 실력도, 감정을 다루는 능력도 강하니까. 백모래가 가볍게 치고 지나간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예전 같았다면 그 말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백모래가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칭찬이자 신뢰가 담긴 말로 받아 들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자신에게는 한없이 버거운 말이었다. 속해 있는 집단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기력한 모습과 적에게 기대고 있는 자신에게 환멸마저 느끼고 있는 지금은 저 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그런데, 내일도 나갈 거야?"

 내일도 나갈 거야, 라는 질문은 매일 계속되는 공원 산책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송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보이지 않지만 백모래에게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일 것이었다. 송하의 단순한 대답에 백모래가 흠, 하고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괜히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백모래가 자신의 산책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지는 않을까 싶었다.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군가가 스푼 일원이자 옛 동료라는 것을 사실은 백모래는 이미 눈치 채고 있지 않을까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라는 말과 함께 백모래가 송하를 놓아주었다. 백모래가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송하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배가 고프다며, 오늘 저녁에는 맛있는 걸 먹고 싶으니 특별 메뉴를 해주지 않겠냐는 백모래의 말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저녁 메뉴들을 중얼거리는 오르카의 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침대에 엎드리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피곤하다. 요즘은 자신을 지치게 하는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동하."

 자신을 가볍게 건드리는 손길과 함께 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박 잠이 들었나 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침대에 엎드려 있었던 것 같은데, 몸은 어느새 공원에 있었다. 아니, 침대에 있었던 것은 어제 일이었던가. 쫓기듯 밖에 나가 시간을 때우고 저녁이 되면 돌아오고,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몸도, 마음도 안정이 되지 못해 하루하루가 너무도 피곤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매일을 살아가려니 힘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어제와 오늘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었다.

"피고내써?"
"아닙니다."

 가벼운 걱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에 하마터면 모든 걸 털어 놓을 뻔했다. 요즘 잠이 안 온다고, 새벽까지 잠을 설치는 일이 잦아졌다고. 하지만 더이상 그런 투정을 부릴 수는 없는 처지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피곤했냐는 질문을 받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시간에 위안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자꾸만 중심을 잃고 무너져 가는 제 모습이 우스웠다. 나이프와 사사, 어느 한 쪽에서 자신에게 뭐라고 해줬으면 싶었다. 중심을 잡지 못해 흔들리는 자신을 끌어내려 누군가가 호되게 야단이라도 쳐주었으면.

 요즘의 송하는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말은 안 해도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포커 페이스가 무너지는 것을 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놀란 얼굴로,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해졌다. 누가 널 이렇게 긴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과연 네가 마음 편히 쉴 때가 있기는 한 것일까.

 아까보다 햇빛이 누그러진 것을 느낀 송하가 중얼거렸다.

"햇빛이 조금 약해졌군요."
"응."
"이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푼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지 않았냐는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사가 가볼게, 하고 작게 대답했다. 사사가 떠난 자리에는 바람만이 남았다. 휑한 느낌에 문득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사사는 돌아갈 곳이 있지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곳이 내 자리가 맞을까. 씁쓸한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송하가 일어섰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곳에 억지로나마 마음을 붙이기 위해.


어둠 속을 걷다 15


"일찍 왔네. 산책이 재미 없었어?"

 재미, 재미라. 재미가 있었다거나 없었다는 말로 쉽게 표현할 성질의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모래에게 자신이 하는 산책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햇빛이 강렬해 견디기가 어려웠다는 말로 산책에서 일찍 돌아온 이유를 정당화시켰다.

"하긴, 요즘 날씨가 더워지긴 했지. 식물 혼혈인 송하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더워졌나봐?"
"...네, 아무래도."

 견디기 어려운 것은 더위가 아니라 흔들리는 마음이었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했다는 박탈감과 하는 일도 없이 마치 기생충처럼 달라붙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자괴감. 사사에게로 기우는 마음, 적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휴식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이런 마음은 위험했다. 한 번 배신한 걸로 족했다. 이곳이 마음에 안 든다며 원래 배신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우스운 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자신을 붙잡아 줄 사람이 없다면 혼자 그 방법을 찾아내는 수 밖에. 사사를 보지 않는다면, 공원에 가지 않는다면 마음이 안정이 될까. 다소 불안한 마음가짐으로라도 이곳에 마음을 붙인다면 해결될 문제일지도.

 밤이 오고, 낮이 지나갔다. 달력을 확인할 수가 없으니 생체 시계로 시간이 흐르는 것을 가늠하거나 아침, 점심, 혹은 저녁 식사를 하라는 오르카의 말에 의지해 겨우 며칠이 지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억지로라도 정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에 며칠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답답했다. 나가고 싶었다. 사사는 아직도 벤치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자신이 나가지 않은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으니 이제는 공원에 오지 않으려나.

"오늘도..."

 오늘도 송하는 공원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사사가 홀로 벤치를 지켰다. 어디를 다쳐서 못 오고 있는 것은 아닐지. 아니면 더이상 오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건지. 송하도 없는데 내일부터는 오지 말자, 하고 다짐을 해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다시 이곳에 오게 되었다. 송하가 내일은 벤치로 올까. 서로의 곁에 앉아 같이 시간을 보내는 날이 또 올까. 아니면 혹시 오는 시간대를 바꾼 건 아닐까. 저녁에도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가 어딘가에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에 송하가 일어섰다. 소리의 근원지는 자신의 방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백모래의 방 앞에 서자 어, 이게 깨졌네, 하는 백모래의 목소리와 함께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고양이가 뭔가를 깨뜨린 것 같았다. 뭐라도 도울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 열려 있는 문 앞에서 백모래를 부르려는 순간 독특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독특하면서도 친숙한 냄새.

"애기야, 그거 먹으면 안 돼. 위험한 거야. 까딱 잘못하면 눈이 멀 수가 있어요. 착하지, 응? 거기서 물러서자."

 그러고 보니, 아직 눈이 보이던 그때, 세상을 볼 수 있었던 마지막 날에도 이 냄새를 맡았었던 것도 같았다. 단순히 냄새만을 맡은 것이 아니라, 뭔가 더 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고양이 돌보느라 수고했어. 자, 마셔.'
'감사합니다. ...냄새가 독특하군요.'
'그렇지? 메두사가 요즘 즐겨 마시는 쥬스라던데 냄새가 좀 그렇긴 해.'

 그때 자신이 마셨던 것이 과연 평범한 쥬스였을까.

'와, 이거 어떡하지?'
'진짜 안 보여? 진짜?'
'우리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갑자기 눈이 안 보이게 됐다면 어느날 갑자기 시력이 돌아올지도 모르지.'
'뭐 어때? 어차피 술래가 되면 눈을 가려야 하는데, 송하는 그런 것도 필요 없고 좋잖아?'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멀쩡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이렇게 된 걸 보면.'
'네 눈빛, 죽어 있어.'

"어? 송하, 언제 왔어? 아, 이거 깨지는 소리 듣고 온 거야?"

 우뚝 멈춰선 자신에게 건네오는 말소리가 들렸다.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운 목소리. 그 목소리로 백모래는 내내 말을 걸었었다. 독하게 마음을 먹고 밖에 나가지 않았던 날들이, 이곳이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을 걷다 16


"무슨 일 있나 싶어서 걱정돼서 보러 와 준 거야? 역시 송하 밖에 없네."

 방으로 발걸음을 하는 자신을 백모래는 막지 않았다. 뭔가 찔리는 것이 있다면 이런 반응을 보일 수는 없을 텐데. 어쩌면 자신이 잘못 짚은 것일 수도 있었다. 단순히 냄새가 비슷한 액체일 수도. 그런데 이런 냄새의 액체가 흔할까. 방으로 더 깊숙이 들어설수록 예전에도 맡아본 냄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백모래 님이셨습니까."
"응?"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백모래의 말투에 가까스로 입을 열어 자신이 알고 싶은 것에 대해 질문을 했다. 질문을 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점차 꺼져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 눈을 이렇게 만든 것이 백모래 님이셨습니까."
"아, 그거."

 백모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뭔가 사과할 말을 찾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이렇게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백모래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입안이 바짝 메말라갔다. 제가 뭔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래서 이런 벌을 준 겁니까.

"어째서... 제가 뭔가 잘못한 일이라도..."
"응? 아니, 송하는 아주 잘해주고 있어. 그렇게 한 건, 글쎄, 아무 이유 없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뭔가 이유라도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 이유를 납득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그래, 그렇구나, 하고서 억지로나마 순응할 수 있었을 터였다. 나이프의 일원으로서 어떻게든 살아나가려고 노력할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백모래는 아무 이유도 없었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백모래가 보여주었던 반응은 순수한 호기심과 자신의 실험이 정말로 성공했다는 신기함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짜 안 보여? 진짜?'
'처음 술래잡기는 송하가 술래!'

 와, 진짜 안 보이는구나, 하는 듯한 느낌, 마치 실험용 쥐를 앞에 둔 사람 같았던 느낌. 목소리에 섞여있던 신기하다는 듯한 감정. 그 안에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은 눈이 보이지 않아 예민해진 감각 때문에 내렸던 섣부른 판단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자신이 느꼈던 위화감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둔했던 탓에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위험한 불장난으로조차도 치부될 수 없는, 한순간의 재미를 위한 장난감. 그 장난감은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대체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할까.

"...아무 이유도 없었다고요."

 허탈함과 분노, 드물게도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뭐, 더 크게 다친 곳은 없으니까 됐잖아? 눈만 불편한 거잖아? 칼은 계속 쓸 수 있다며?"

 자신의 말을 이용해가며 대꾸를 하고 있는 백모래의 말을 듣자 기가 막혔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한 사람의 눈을 망가뜨렸다. 검사에게는 눈이 더없이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건만, 그걸 아무 생각도 없이 망가뜨려버릴만큼 자신은 그에게 소속된 일원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뜻일까. 자신은 대체 백모래한테 뭐였을까.

"눈이 안 보여도 칼을 쓸 수 있다고 한 건 송하잖아."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눈을 망가뜨리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그건 미안해."

 저 사과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자신의 추궁에 자동적으로 내뱉는 말일 뿐, 진심은 담겨 있지 않다. 메마른 입술을 깨물자 금방이라도 피가 날 것처럼 아릿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의 온도가 아까보다 높아진 것 같은 기분까지 들고 있었다.

"어? 불 난다!"
"오르카, 물 좀 갖고 와!"

 메두사의 말과 함께 금세 차가운 물방울들이 옷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메두사랑 오르카는 또 언제 왔대?"
"목소리가 들려서 와 봤어요. 뭔가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서요."
"다 듣고 있었던 거야?"
"그런 셈이죠."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들어 있었다. 메두사와 오르카의 눈길은 평소와 다름 없어 보이는 백모래를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백모래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백모래는 정녕 미친 게 틀림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이프의 보스였고, 심사가 뒤틀리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항의를 하기보다 침묵을 선택했다.

 별안간 송하가 몸을 돌려 불안한 걸음으로, 그러나 재빨리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송하를 따라가기 위해 오르카가 열린 현관문으로 반쯤 몸을 트는 순간 백모래가 태평한 목소리로 그 행동을 막았다.

"그냥 놔둬. 때 되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하지만... 혹시 돌아가기라도 하면..."

 오르카가 불안한 얼굴로 말을 했다. 메두사도 어느새 심각한 얼굴이 되어 백모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백모래는 그 둘의 걱정과는 상반되는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백모래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오르카에게 되물었다.

"송하가 갈 곳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그... 스푼에 가기라도 하면... 지금 제가 나갔다올까요. 지금 상태로는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백모래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됐어. 잠시 다녀오라고 해. 나한테 화가 날 만도 하지."

 다시 한 번 송하를 내버려두라고 말하며 백모래가 발치를 서성이고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어차피 걔가 돌아올 곳은 여기 밖에 없어."


다음편 예고:


"사사. 제가 스푼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자신을 붙들고 있던 팔의 힘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눈이 안 보여도 칼은 쓸 수 있습니다. 예전처럼 같이 싸울 수..."


어둠 속을 걷다 17


 한참을 그렇게 어둠 속을 달렸다.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어떻게든 나이프 아지트와 멀어지고 싶어 숨이 차오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문득 공원의 흙 냄새를 맡은 송하가 멈춰섰다. 몸이 본능적으로 공원을 찾은 것 같았다.

 송하? 혹시나 싶어 밤에 공원을 찾아보기로 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다가가 팔을 잡으니 경계하며 몸을 뒤로 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달려오는 와중에 긁힌 것인지 자잘한 상처들이 온 몸에 가득했다. 네가 공원을 찾지 않을 동안 네게는 감당하지 못할 어떤 일이 있었던가 보다. 그건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나야."

 진정해, 송하. 나야.

"사사."
"응. 나야."

 문득 서러워졌다. 왜 스푼을 떠났을까. 어째서 사사를 배신했을까. 사사에게 붙잡힌 그대로 송하가 물었다.

"사사. 제가 스푼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자신을 붙들고 있던 팔의 힘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눈이 안 보여도 칼은 쓸 수 있습니다. 예전처럼 같이 싸울 수..."

 끝맺지 못한 말이 귓가에 처량하게 울렸다.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미 배신자라는 딱지가 붙어버린 이상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왜 돌아왔냐는 예전 상사의 날카로운 말도, 어릴 적 자신이 놀아주었던 아이의 차가운 시선도 자신은 견뎌낼 수 있었다. 모든 스푼 사원들에게 욕을 듣는다 해도, 그들이 경멸 어린 눈길을 대놓고 내보인다 해도. 귀야 막으면 될 테고, 눈이 보이지 않으니 그것을 핑계로 그들의 눈길을 모른 척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사사와 함께 돌아가게 된다면 사사는 그동안 적과 내통했다는 뒷말을 들어야 할 것이었다. 사사에게 웃어보이며 호감을 내비치던 사원들, 사사의 팀원들은 사사에게 벽을 쌓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가장 친해야 할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자신을 피한다는 것에 대한 슬픔, 그것을 알면서도 말할 수 없는 괴로움. 그 모든 것들을 삼킨 채 제게는 부드러운 시선만을 보낼 사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싫었다. 그래서 돌아갈 수 없었다. 모든 질타를 받는 것이 오로지 자신 혼자 뿐이라면, 어쩌면 스푼으로 돌아가는 것을 꿈꿔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사의 일상까지 망치기는 싫었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자신 혼자로 충분했다.

"네가... 네가 가자고..."

 네가 먼저 돌아가자고 했잖아. 먼저 가자고 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거야. 나하고 같이 가기 싫은 거야? 나는 너하고 예전처럼 지내고 싶은데. 나는 너만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은데. 너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뭐든 견뎌낼 수 있는데. 스푼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는 송하의 말을 들었을 때 환해졌던 마음이 순식간에 불이 꺼져버린 것처럼 가라 앉았다. 왜 그 말을 끝맺지 않는 거야.

"가자."

 그러니까 같이 가자. 제발 같이 돌아가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지금 출발하면 돼.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내 기숙사에 같이 있다가 내일 아침 일찍 서장실로 가자. 틀림없이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사실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온전히 예전의 생활을 찾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자. 응?"

 흐느끼며 쏟아내는 말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쏟아내는 사사의 목소리가 듣기에 슬펐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을수록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은 단 한 곳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을 붙든 채 흐느끼는 사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송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도 그럴 수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슬프게도,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스푼을 배신한 것은 자신이었고, 백모래의 성격을 알면서도 나이프에 들어간 것도 자신이었다. 백모래의 천진함으로 둘러싸인, 그러나 실상은 잔인하기 그지 없는 칼 끝이 저를 향했다고 해서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사사라면 자신의 불평을 말없이 들어주겠지만, 사람이 염치가 있다면 불평을 하는 것은 여기서 그만두어야 했다. 벌을 받나. 이 사람을, 속해 있던 곳을 배신했던 벌을 이제야 받는 건가.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백모래에게 화가 났던 것도 서서히 식었다. 이제 자신이 돌아갈 곳은 나이프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하며 송하가 그 말을 하자 사사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로?"

 알면서도 일부러 묻는 짓이었다.

"나이프로 말입니다."
"나랑은?"

 나랑 같이 안 가고? 잠시 조용히 있던 송하가 고개를 저었다.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준 사사가 송하에게는 보이지 않을 눈물겨운 미소를 지었다. 그 잠깐 동안의 망설임은 송하가 잠시나마 보여주었던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잠깐 동안만이라도 저와 같이 스푼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해 준 것이 고마웠다. 언젠가는 정말 송하와 스푼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자 오늘은 송하를 이대로 보내줄 마음이 생겼다. 나중에 또 봐. 아니, 내일 또 봐, 송하.

 억지로 발걸음을 해가며 나이프 아지트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돌아가기 싫지만 자신이 돌아갈 곳은 여기 뿐이었다. 스푼에는 더이상 돌아갈 수가 없었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곳, 스푼. 오기 싫었지만 올 수 밖에 없는 곳, 나이프. 몇 시간 전 자신이 뛰쳐나왔던 곳, 그리고 다시 제 발로 찾아온 곳. 다시 돌아온 자신을 보고 그들은 어떻게 반응을 할까. 그렇게 기세 좋게 뛰쳐나갔더니 결국 기어들어 왔구나, 라는 비아냥이 돌아올까. 혹시나 스푼과 접촉하지 않았냐는 말을 듣지는 않을까. 그러나 긴장한 마음으로 문을 연 것치고는 허무하게도, 아무렇지도 않은 인사의 말이 들려왔다.

"왔어?"
"네. 왔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건네는 말에 송하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백모래가 소리 없이 웃으며 봐, 돌아왔잖아, 라는 의미가 담긴 시선을 오르카와 메두사에게 보냈다. 송하가 돌아올 곳은 이 곳 밖에 없어. 우리가 그렇듯이.


다음편 예고:


 밤이면 스푼과 나이프가 뒤섞여 꿈에 나왔다. 아침이 되면 밖에 나가 사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사사는 오지 않았다. 오늘만 오지 못한 것이겠지, 싶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자신이 기다리는 이는 공원을 찾지 않았다. 이제는 사사마저 저를 버린 것일까.


어둠 속을 걷다 18


"야, 너희들 출장. 지금 당장 출발해라."

 아침 일찍 다나가 비행팀 모두를 소환한 후 대뜸 출장을 요구했다. 며칠 걸릴 것 같으니 각오하고 가라는 다나의 말에 나가가 소심하게 항의했다.

"출장이요? 저 학교 가야 되는데..."
"결석계 써주면 되잖아."

 단박에 출장 잘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외치는 나가의 말을 들으며 사사가 송하와의 약속을 생각했다. 송하는 어떡하지. 공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텐데. 오늘 꼭 보자고 했는데. 등 떠밀려 가게 된 출장길이 달갑지 않았다. 출장 간 김에 시간이 남으면 관광이라도 하자며 자신의 팀원들은 신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선배, 준비 다 하셨어요?"
"응."

 나가와 혜나의 얼굴을 쳐다보며 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아가던 중 공원을 발견한 사사가 그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인지 송하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이곳으로 송하가 나오겠지. 오늘 보기로 한 약속을 못 지킬 것 같다. 내가 널 보러갈 수 없는 며칠 동안 잘 지내고 있길. 혹시라도 내가 널 일부러 보러 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길.

 과연 자신은 백모래에게 부하로 생각 되기는 했을까. 스푼에서 나이프로 옮겨온 재밌는 배신자로만 생각 된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단순한 흥밋거리였을지도. 과연 나는 이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칠 수 있을까. 그 어느 생각도 확신할 수 없어 괴로웠다. 어느 누구에게도 던지지 못할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고 있자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스푼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사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그때 미친 척하고 같이 스푼으로 돌아갈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자고 고고한 척을 했나. 한 번 배신한 거, 두 번은 못할까 싶었다. 철면피라고 욕을 들어도 좋으니 정말로 스푼으로 발걸음을 할까. 다시 한 번 나를 받아달라고 빌기라도 해볼까. 이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심심풀이 대상이 되어도 좋으니, 또 한 번 그렇게 이용 당하고 버려져도 좋으니 사사 곁으로 갈 수 있었으면.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몸과 마음의 괴리감으로 인해 현실과 망상을 구분 지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헛된 꿈만 꾸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 스푼 기숙사일까, 아니면 나이프 아지트일까. 뒤를 돌아보면 자신의 옛 팀원들과 사사가 보일 것 같았다. 정말로 누군가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임무를 나가기 위해 급하게 뛰느라 스푼 복도에 울리던 발자국 소리, 제압 당한 범인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범인의 목소리는 백모래의 목소리로 바뀌기도 했고, 팀원들의 얼굴은 오르카와 메두사로 바뀌어 자신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밤이면 스푼과 나이프가 뒤섞여 꿈에 나왔다. 아침이 되면 밖에 나가 사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사사는 오지 않았다. 오늘만 오지 못한 것이겠지, 싶었다. 임무가 많아서 못 올 수도 있었다. 내일이면 어제 못 와서 미안하다며 자신에게 말을 건네줄지도. 오늘 와주었으니 괜찮다는 대답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자신이 기다리는 이는 공원을 찾지 않았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할 수 있는 한 오래 공원에 머물러도 사사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는 사사마저 저를 버린 것일까.

 허탈한 웃음이 지어졌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둠 속을 걷다 19 (完)


 더이상 공원을 찾지 않기로 결심했다. 영영 채워지지 않을 옆자리를 생각하니 허망하기만 했다. 사실은 이게 맞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동안 얼굴을 봐준 것만 해도 고맙다고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던 자신을 도와준 것만 해도 고맙고, 같이 스푼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해준 것만 해도 고마웠다. 하지만 어째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던 버팀목마저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동료도, 시력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사사와 공원에서 만나던 시간은 유일하게 제 손에 남은 것이었다고. 하지만 그 시간도 이제는 끝이 났다. 이제 제게 남은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사사조차 자신을 버린 지금,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며칠 동안 최선의 선택을 찾아내기 위해 고민하던 송하의 얼굴에 문득 희미한 웃음이 비쳤다.

 몸에서 칼집을 풀어낸 송하가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눈이 멀어버린 이후로 단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던 칼을 망설임 없이 꺼내 들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혹은 누군가를 베기 위해 썼던 칼을 이 용도로 쓰게 될 줄은 과거의 자신은 꿈에도 몰랐을 터였다.

 사실은 스푼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사 곁으로 다시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사사는 절 봐주지 않을 테지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배신자라 욕하지 않고, 이토록 추해져버린 절 예전처럼 대해주어서 한없이 고마웠습니다. 머릿속에서 끝내 지워지지 않는 사사의 모습을 애써 지워내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또렷해지고 있었다. 사사를 생각하자 칼을 붙잡은 손길이 떨리던 것이 멈췄다. 아까보다는 한결 수월하게 칼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사사는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사사, 가는 길 내내 혼자 어둠 속을 걸어야 할 테지만 사사와 만났던 기억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근데 송하는 왜 안 와?"
"글쎄요?"
"내가 가볼게."
"제가 가도 괜찮은데요."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앉은 식탁에는 오로지 한 사람의 자리만이 비어 있었다. 송하는 왜 안 오느냐는 백모래의 질문에 메두사가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의자에 앉아 발을 흔들던 백모래가 일어섰다. 자신을 따라 일어선 오르카를 만류하며 백모래가 날쌘 걸음으로 송하의 방을 찾았다.

"송하. ...어, 죽었다."

 처음 다녀와보는 출장에 나가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관광은 고사하고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장했다. 임무 보고가 끝나자마자 어서 집에 가서 쉬라며 나가와 혜나의 어깨를 토닥여준 사사가 서장실을 나와 스푼 복도를 달렸다. 점심 시간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 공원을 가면 간신히 송하와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얼굴을 보게 될 송하에게 해줄 말이 많았다. 갑자기 출장을 가게 되어서 공원을 찾을 수 없었어. 미안해. 나 기다리고 있었지? 그동안 혼자 공원에서 뭘 하고 있었어? 못 본 사이에 잘 지내고 있었어? 송하에게 할 말을 정리하며 사사가 달리던 속도를 높였다.

"오늘도 혼자 어디로 가시는 거에요?"
"응."
"겨울에도 점심 시간만 되면 어디로 가시더니, 지금도 여전하시네요."

 이제는 점심을 먹을 때가 되면 나가와 혜나는 오늘도 일이 있냐며 알아서 자신을 보내주고 있었다. 공원을 찾은 사사가 송하와 앉던 벤치를 찾았다. 칼바람이 불던 계절은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봄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얇은 와이셔츠와 조끼만을 입고 다니던 송하를 생각하면 잘된 일이었다. 이제는 그 차림새로 다녀도 송하는 춥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도 오지 않는 걸까. 송하는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송하, 네 모습이 보이지 않은지 오래됐다. 네가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언제든 돌아올 너를 맞이하기 위해 나는 여전히 이곳에서 널 기다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이곳까지 올 기운이 없어서 오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벌써 봄이 오고 있다. 봄이 오면 네가 다시 이곳으로 와줄까. 널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네 모습을 보여줄까. 봄이 왔을 때 네가 오지 않아도 괜찮다. 여름에도, 가을에도, 또 겨울에도, 눈이 보이지 않는 네가 다시 길을 찾아 나에게로 올 때까지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면 될 테니.


꽃이 진 후에 우리는 다시 시작 (어둠 속을 걷다 에필로그)


 나이프 일당들을 잡아들였다. 모든 일의 원흉이었던 백모래를 시작으로 모든 이들을 잡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너는 없었다. 너는 싸움판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너만 다른 곳으로 빼돌린 것일까. 그렇게까지 할 만큼 이 남자는 치밀한 사람이었던가. 말없이 그에게 시선을 주는 순간 반쯤 풀린 붕대 사이로 그가 눈을 마주쳐왔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누구 찾아? 네 친구? 송하 찾는 거 맞지?"

 이 질문에 긍정을 한다면 그는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어줄 생각이 있을까.

"죽었어."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멍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겨우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웃는 얼굴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니 이런 거짓말쯤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터.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은 확실히 못된 짓이다. 그러나 그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짜야."

 언제, 어떻게? 휴대폰을 보여주자 그가 대답을 했다. 그가 말한 시기는 네가 더이상 공원으로 오지 않은 때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내가 죽인 건 아니야. 아침 먹으러 안 오는 걸 부르려고 갔더니 죽어 있더라고. 무덤은 못 만들어줬어. 대신에 명복은 빌어줬으니 그걸로 봐줘."

 너는 내게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지 못한 거였다. 너는 이 자에게로 가서 대체 무엇을 얻었나. 그는 죽어버린 널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지도 않았다. 너는 정말 그곳에서 온전히 너를 위해 무언가를 얻은 것이 있기는 했나. 마지막으로 보았던 네 얼굴이 떠올랐다. 네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사사. 제가 스푼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저도 그럴 수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좀처럼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던 네가 겨우 보여준 진심이었다. 그때 널 잡았어야 했는데. 억지로 끌고가면 아슬아슬한 걸음으로 결국에는 네가 날 따라왔을지도. 너는 어째서 생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그렇게나 삶이 힘들었던 것일까. 널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의 얼만큼은 이 자의 책임이 있겠지. 코트 주머니에 있는 총을 찾자 그것을 눈치챈 그가 피식 웃었다.

"아무리 내가 사형이 확정된 사람이라지만 네가 날 죽이면 안 될 텐데."

 그의 말이 맞았다. 그를 죽이는 것은 법의 몫이지 내가 할 일은 아니었다. 힘없이 돌아서는 내 뒤로 그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안됐네, 네 친구가 죽어서."

 친구. 네가 나의 친구였을까. 너는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너만 있으면 뭐든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은 진심이었다. 나는 네 곁에 있고 싶었다. 그게 어떤 형태로라도 좋았다. 그러나 너는 나에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너는 혼자서 저승길을 걸어가버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휘청이며 걸어갔을까. 죽을 때도 혼자였고, 가는 길도 혼자였다. 너는 끝내 어둠 속을 헤맸던 건가. 또 한번의 계절이 바뀌고, 여러 번 봄이 찾아와도 너는 내게 오지 않겠지. 네가 다시 길을 찾아 나에게로 올 일은 한평생 일어나지 않을 테지. 그렇다면 꽃이 진 후에 우리는 다시 시작하면 된다. 내 목숨이 다한 후 네가 있을 곳으로 걸어가면 될 일이다. 그렇게 하면 된다.

 

Posted by 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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