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사사x송하] 어둠 속을 걷다 1~19 + 에필로그 (完)
어둠 속을 걷다 1
언젠가부터 어둠이 눈 위에 내려 앉았다. 내가 볼 수 있는 세계는 오로지 까맣고, 까만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송하, 괜찮아?"
"괜찮습니다."
백모래가 송하의 앞에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송하의 눈동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흔들던 것을 멈추던 백모래가 보기 드물게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당황함보다는 일종의 신기함마저 섞여있는 목소리였다.
"와, 이거 어떡하지?"
얼마 전부터 눈앞이 흐릿하다 했더니, 이제는 시야가 완전히 깜깜해졌다. 몇 번을 눈을 감았다 떠봐도 보이는 건 까만 어둠 뿐이었다.
"칼은 쓸 수 있으려나."
"할 수 있습니다.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칼을 못 쓰는 건 아니니까요."
스푼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실력을 가진 검사였었다. 앞이 안 보인다고 해서 그 실력이 어디 갈 리 없었다. 눈이 안 보이는 본인은 놔두고 백모래가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제 송하는 눈이 완전히 안 보이나봐, 어쩌지. 그러면 이제 어떡하냐는 메두사의 목소리도 들리고, 오르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본인은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주변인들끼리 왈가왈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눈이 안 보이니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백모래의 목소리에 섞인 안타까움보다는 신기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지고 가는 것이 느껴졌다. 철이 들기 전부터 갖고 다녔던 칼을 꽉 쥔 채 송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잠시 산책 좀 하고 오겠습니다."
"혼자서?"
"네. 모르는 곳도 아니고, 충분히 혼자서 갔다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누가 좀 같이 가주지, 하는 백모래의 말을 뒤로 한 채 송하가 현관문을 닫았다. 같은 나이프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어느 누가 선뜻 그를 도와주겠다고 나서겠는가. 인간 관계가 서투른 송하였기에 나이프 일원들과는 어느 정도의 관계 이상을 쌓아 나갈 수 없었다. 그것이 이렇게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다. 혼자서 산책을 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송하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킨 뒤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앞이 안 보이는 자신에게는 늘 걷던 거리마저도 새롭게 느껴졌다.
자신의 앞에서 휘청이듯 몇 걸음 걷고 있는 익숙한 형체를 발견한 사사가 눈을 크게 떴다. 나이프, 송하. 이곳은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공원 안이었고, 둘이서 대치한다고 한들 누구도 그들을 발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사사가 본능적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반응을 했어야 할 송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불안정한 걸음으로 제게로 한 발자국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앞에 제가 있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못 알아볼래야 그럴 수가 없는데. 사사가 어물거리는 사이 송하는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송하가 끝내 휘청이는 순간 사사가 무의식적으로 총을 거두어버렸다. 총을 붙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송하를 붙잡았다.
"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혀 뜻밖의 말에 사사가 굳었다. 자신과 농담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농담이어도, 장난이어도 너무 지나치다. 그리고 제가 아는 송하는 적과 시덥잖은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사사가 송하의 얼굴을 보다가 그의 시선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사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이제 안 잡아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최대한 허리를 피려고 노력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으로 송하가 중얼거렸다. 이건 농담도, 질 나쁜 장난도 아니다. 사사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송하를 놓아주었다. 멀어져가는 송하를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사사가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정말 네게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대체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어둠 속을 걷다 2
"진짜 안 보여? 진짜?"
백모래가 몇 번이나 그렇게 물었다. 여전히 목소리에는 신기하다는 듯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와, 진짜 안 보이는구나, 하는 듯한 느낌. 마치 실험용 쥐를 앞에 둔 사람 같았다. 눈이 안 보인다는 송하를 앞에 두고 손을 흔들거나 제자리에서 방방 뛰어보이는 등, 별 짓을 다 하고 있었다. 자기 말로는 지금 손을 흔들고 있다는데, 송하에게는 손의 흔들림으로 인해 일어난 바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백모래의 똑같은 질문의 반복에도 송하는 몇 번이고 대답해주었다. 진짜 안 보여? 네, 안 보입니다. 몇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게 듣기 싫다며 메두사가 백모래를 한 대 친 끝에야 의미 없는 질문과 대답의 반복이 끝이 났다.
"근데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지?"
메두사가 팔짱을 낀 채 백모래의 옆에 앉아 이상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그렇게 됐을까."
오르카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머뭇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혹시 산에서 수련하다가 독성이 있는 것을 잘못 섭취하셨다거나..."
"그럴 리는 없습니다."
송하가 고개를 저었다. 산에서 자라나는 수많은 식물들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산은 그에게 매우 친숙한 장소였고, 독성이 있는 풀을 함부로 섭취할 만큼 조심성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독성이 있는 풀을 먹었다 한들 이렇게 며칠에 걸쳐 효과가 나타날까. 백모래가 별안간 앉은 자리에서 자세를 약간 바꿔 소파에 반쯤 드러 누웠다. 송하는 더이상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백모래가 배가 고프다며 배를 툭툭 두드리더니 송하의 눈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것마냥 딴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 나 배고파. 오르카, 우리 오늘 저녁 뭐야?"
"보스, 지금 저녁 얘기를 할 때에요?"
메두사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찰싹, 가볍게 등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갑자기 눈이 안 보이게 됐다면 어느날 갑자기 시력이 돌아올지도 모르지."
언뜻 들으면 무정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백모래의 말이 맞았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백모래 님 말씀이 맞습니다. 일단 며칠 두고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군요."
송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놀란 것은 오르카였다. 아무리 별 감정 없이 무덤덤하게 사는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자신의 눈인데, 무엇보다도 불편할 사람이 저렇게 쉽게 말을 할 수가 있다니. 어쩌면 시력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저리 쉽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여러가지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오르카가 혀를 내둘렀다.
"뭐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으세요?"
"난 계란찜!"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느냐는 말에 백모래가 신나게 외쳤다. 백모래의 바램대로 그날 저녁 식탁에는 계란찜이 올라왔고, 역시 오르카의 음식 솜씨는 최고라며 백모래가 칭찬을 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떠들썩한 저녁 식사 시간, 송하 혼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눈이 보이질 않으니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있나. 어림짐작으로 뭐가 어디에 있겠구나, 하고 손을 뻗어 보기는 했지만 번번이 허탕을 쳤다. 그러다가 끝내는 숟가락을 놓아 버렸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송하를 보며 백모래가 소리쳤다.
"송하, 밥 다 먹었어?"
"네."
"이제 자러 가려고? 잘 자!"
백모래가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나이프 아지트의 구조는 대체로 바뀌지 않는 편이었고, 아지트 안에서는 그나마 무리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송하가 방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몇 번을 눈을 깜박여 보았다. 보이는 것은 어둠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싶어서였다. 송하가 늘 갖고 다니던 검을 톡톡 건드렸다. 아주 오래 전부터 가지고 다녔던 검이었다. 그러니까, 스푼 시절에서도 이것을 갖고 다녔다는 뜻이다. 스푼에 있었던 때를 생각하자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 생각나는 사람이 어째서 사사, 그 사람 하나 뿐일까. 예나 지금이나, 마음이 허할 때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변하지 않았다.
다음편 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송하는 현재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그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비록 배신자여도,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 정도는 해줘도 되겠지. 사사가 송하에게로 손을 뻗었다. 혹시나 자신인 것을 들킬까 싶어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어둠 속을 걷다 3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백모래는 가급적 송하에게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으려 했고, 송하가 맡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던 일은 대부분 오르카에게로 넘어갔다. 백모래도, 오르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송하는 자신이 짐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칼을 쓰는 일이라면 할 수 있다, 어렵지 않게 맡은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하자 백모래의 대답은 이랬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모르잖아. 눈도 안 보이면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그래."
그 대답을 듣자 말문이 막혔다. 백모래는 헤실거리며 웃다가도 정곡을 찌르는 일이 잦았다. 백모래의 그런 성격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곡을 찔리는 쪽이 자신이 되니 기분이 과히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묘하게 서운한 감정을 느끼다가 이내 체념했다. 하긴, 이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밥 먹을 때 반찬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허둥대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벌써 며칠째, 본의 아니게 굶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그저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려니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자주 가던 공원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송하의 주된 일상이 되었다. 눈이 안 보이면서도 기어코 밖에 나가는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집안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다. 아무도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지만 송하 혼자 이렇지 않을까, 저렇지 않을까 하며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기도 전에 송하가 밖을 나섰다. 불어오는 바람이 봄바람답지 않게 차가웠다. 봄바람이면 살랑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오늘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렇게 바람에 신경을 쓰며 걷느라 앞에 뭔가가 있는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철퍼덕, 바닥에 손을 짚고 넘어지게 되었다. 상당히 흉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쌩쌩, 바람 소리를 내며 사라져갔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서 넘어진 건지, 어느 누구한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 송하가 답지 않게 허둥거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곁을 스쳐가던 바람 소리가 잦아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앞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앞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저 그렇게 바닥에 손을 짚고 있었다.
넘어져도 왜 하필이면 자신의 앞에 넘어져 있는 것일까. 사사가 총을 꺼내서 송하를 겨누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와주느냐, 마느냐, 잠시 동안 고민에 빠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송하는 현재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그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비록 배신자여도,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 정도는 해줘도 되겠지. 사사가 송하에게로 손을 뻗었다. 혹시나 자신인 것을 들킬까 싶어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사사가 손을 내밀어 송하의 손을 잡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송하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잡은, 익숙한 온기에 잠시나마 예전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상은 자신도, 송하도 같이 있었던 시절과는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이들과 살아가고 있는 상태이지만. 송하를 일으켜세우자마자 사사가 손을 놓았다. 그 순간, 최면에 걸렸다 깨어난 것처럼 다시금 현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사사가 송하를 쳐다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배신자. 스푼과 나를 배신한 한없이 미운 사람. 송하를 내버려둔 채 사사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귓가에 들리는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애써 모른 척 했다. 너무 빨리 손을 놓아버린 탓에 혹시나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휘청거리지는 않았을까. 송하에게로 저절로 눈길이 가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그렇게 모질게 돌아섰지만 내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푼에 돌아와서도 자꾸만 송하 생각이 났다. 잘 들어갔을까.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왔던 곳으로 돌아갔을까. 그렇다고 해서 아직 널 용서한 것은 아니다. 넌 배신자임에 틀림이 없다. 오늘 널 공격하지 않았던 건 근처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였다. 괜한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을 뿐이다. 애써 변명거리를 생각해낸 사사가 송하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다음편 예고:
그렇게 당당하던 송하가 바닥에 주저앉아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너는 이런 꼴을 보여주려고 스푼을, 나를 떠났던가. 잘 좀 살지. 이왕 떠났으면, 후에 서로에게 무기를 들이대는 날이 오더라도 그때까지는 당당하게 있을 것이지. 사사가 잠시 송하 쪽을 보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둠 속을 걷다 4
"오빠, 우리 같이 점심 안 먹을래?"
"아... 오느른..."
"저번에도 일이 있다고 하시더니, 오늘도 할 일이 있으신 거에요?"
"응."
아쉽다는 얼굴을 한 채 사사를 보내주는 혜나와 나가를 보며 사사가 엷게 웃어주었다. 벌써 며칠째 사사는 점심 시간에 점심을 같이 먹자는 나가와 혜나의 제안을 마다하고 공원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곳에 가면 벤치에 앉아 있는 송하를 볼 수 있었다. 산책을 하기 위해 나온 공원에서 맨 처음 송하를 만났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사사는 또다시 공원에 발걸음을 했고, 어김없이 송하를 볼 수 있었다. 송하는 예전보다 야윈 것 같았지만, 표정만큼은 덤덤했다.
생각보다는 슬퍼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답답해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사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할 것은 없었다. 배신자를 두고 그렇게 생각을 하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원래 남을 잘 미워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는 해도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제 성격이 무를 줄은 몰랐다. 자, 그렇다면 이제 어떡해야 하는 것일까. 당장 송하에게 달려들어 총으로 그 목숨을 위협해야 하나. 주머니에 넣어둔 총을 만지작거리며 사사가 송하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자신이 제 무기를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송하 역시 칼을 매만지고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표정 없는 얼굴로 칼을 만지는 모습이 송하답지 않게 퍽 처량해보였다.
칼을 만지고 있던 손에 한순간 힘이 풀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디에 떨어진 것일까.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난 것으로 봐서는 이 근처에 떨어진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인데. 근처에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아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하긴, 사람이 있다고 해도 대놓고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원래부터 혼자 모든 것을 다 해내려고 하는 성격 탓에, 우물쭈물거리다가 입술조차 떼지 못했을 것이 뻔했다.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앉아 한참 동안 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모래알에 쓸린 손바닥이 쓰라렸다. 하지만 손바닥이 통증보다도 혹시나 칼을 못 찾을까 하는 걱정이 송하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당당하던 송하가 바닥에 주저앉아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너는 이런 꼴을 보여주려고 스푼을, 나를 떠났던가. 잘 좀 살지. 이왕 떠났으면, 후에 서로에게 무기를 들이대는 날이 오더라도 그때까지는 당당하게 있을 것이지. 사사가 잠시 송하 쪽을 보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리 벤치 근처를 손바닥으로 쓸어봐도 칼은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 무거운 칼이 바람에 날려가는 일은 일어날 리가 없을 것인데. 아니면 혹시나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홀랑 집어갔을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칼을 찾아야 했다. 오랜 친구도, 시력도 잃어버린 자신에게 남은 것은 검을 다루는 실력과 그 실력을 뒷받침해줄 칼 뿐이었다. 정말이지, 자신에게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력을 잃어버린 검사란 얼마나 쓸모 없는 존재인 것인지. 타고난 검술 실력이 있다고는 해도 그것만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얼마 안 가서 나이프에서도 내쳐지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아침부터 도망치듯 공원에 나오는 이유 중 한 가지가 그것이었다. 백모래가, 혹은 백모래의 말을 전달해주기 위해 온 오르카가 미안하지만 나이프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 라고 하지는 않을지. 아니, 순순히 자신을 보내줄 리는 없었다. 나이프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일지도 모른다는 편이 훨씬 신빙성이 있었다. 뭐가 어찌되었든 간에, 자신에게 썩 유쾌한 결말은 아니었다. 무섭다. 정말 무섭다.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사실도 무섭고, 어떤 결말이 다가올지 몰라 무서웠다.
목을 조여오는, 숨이 막히는 현실 속에서 더없이 그리운 사람이 있었다. 마음 속에 꾹 눌러담은 채, 차마 추억을 들여다볼 수도 없어 모른 척 해왔던 사람. 사사, 당신은 이런 꼴을 하고 있는 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스푼을 배신하더니 참 꼴 좋다, 라고 할까요. 아니, 당신이라면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요.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어둠 속을 걷다 5
"우리 술래잡기 하자!"
"뭐라고요? 갑자기 무슨 술래잡기에요."
"하자, 응?"
"됐어요. 저리 가서 고양이들하고 놀아요."
"고양이들하고 술래잡기를 할 수는 없잖아!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하고 놀 사람은 없어?"
많은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메두사와 오르카, 송하, 그리고 자신 뿐이었거늘. 아지트에서 자기와 함께 놀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백모래가 징징거렸다. 아이 같은 칭얼거림에 메두사가 제발 좀 그만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만하라는 말에 그만둘 백모래가 아니었다. 메두사한테 아예 달라붙어서 놀자, 놀자, 하고 몇 번을 반복한 끝에 승낙을 얻어냈다. 메두사는 몇 번 놀아주고 백모래를 떼어낼 심산으로 알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에서 저녁에 먹을 반찬을 뭘로 할지 궁리하고 있던 오르카도 얼떨결에 끌려왔다. 어느새 인원이 다 모였다며 백모래가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럼, 술래를 누구로 정해볼까?"
백모래가 신이 나서 외치고 있었다. 술래잡기를 하면 거실이 난장판이 될 것이 뻔했으니, 방으로 가 있을 생각으로 송하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백모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모래가 지정한 술래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까지는 몇 분의 시간이 걸렸다. 비록 자신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상당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
"처음 술래잡기는 송하가 술래!"
메두사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 옆에 서 있던 오르카도 상당히 당황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송하의 팔을 붙잡고 어서 시작하자며 백모래가 해맑게 웃었다. 백모래의 웃음소리에는 묘한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백모래의 힘에 이끌려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서 거실 중앙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정말 자신을 술래를 시킬 참이었나, 하는 생각에 송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자신의 상태를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백모래의 생각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백모래는 매우 즐거워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 즐거움은 지금부터 할 놀이를 향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상태에 대한 것일까.
"송하를 시키면 어떡해요, 보스."
"뭐 어때? 어차피 술래가 되면 눈을 가려야 하는데, 송하는 그런 것도 필요 없고 좋잖아?"
백모래가 하고 싶어하는 술래잡기는 술래의 눈을 가리고 박수소리에 의지한 채 다른 이들을 잡아내는 술래잡기였다. 어린 아이들이 흔히 하는 얼음땡이라든가, 그런 것들도 있는데 어째서 굳이 그 놀이를 하겠다는 것일까. 이런 놀이를 함으로써 눈이 보이지 않는 내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송하가 그건 아닐 거라며 부정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백모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기는 해도 제 부하의 마음을 후벼파는 사람은 아닐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건 좀..."
"왜? 별로야? ...하기 싫어, 송하?"
오르카가 소심하게 그건 좀, 하고 말을 하자 백모래가 금세 입술을 삐죽였다. 놀이를 하자며 떼를 쓰는 모습도,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도 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 앞의 질문은 메두사와 오르카를 향한 것이었고, 하기 싫어? 하는 질문은 송하를 향한 것이었다. 송하가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나이프의 임무를 해낼 수 없다면, 이런 식으로라도 백모래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어떤 식으로라든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송하는 괜찮다고 하잖아. 술래잡기 하자!"
"괜찮다고 하는 게 진짜 괜찮은 걸로 보여요?"
메두사가 난 안 할래요, 하며 거실을 나섰다.
"오르카, 다시 저녁 준비를 해도 될 것 같아."
백모래와 메두사 사이에 끼여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오르카를 메두사는 단 한 마디로 그 속에서 빼내주었다.
"모두 하기 싫은 거야?"
여전히 송하의 팔을 붙잡은 채 칭얼거리다가 백모래가 그 팔을 놓아주었다. 어느새 자신의 곁에 다가왔다가 멀리 물러나버리는 고양이를 억지로 붙들어 안아 올리며 백모래가 중얼거렸다.
"모두 안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근데, 참 신기하네. 진짜로 안 보인다니."
그 말을 남긴 채 백모래가 자리를 떴다. 참 신기하네, 진짜로 안 보인다니, 하는 말이 왠지 섬뜩하게 들렸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투로 들리기까지 했다. 검을 다루기 위해서는 시력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보이지 않는다며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백모래의 말 뜻을 짐작하기를 포기한 송하가 그 근처를 더듬거리며 앉을 곳을 찾았다. 백모래가 설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닐 것이었다. 예민해진 기분 탓에 괜히 상처 받을 생각만 골라하고 있는 자신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밑바닥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둠 속을 걷다 6
그곳에 가면 언제나 그를 볼 수 있다. 오늘도 있으려나, 아니, 있을 테지. 사사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제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은 송하가 옆으로 살짝 몸을 움직였다. 제가 비켜준 자리에 누군가가 앉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존재이지만 언젠가부터 비슷한 시간대에 오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옆에 앉으라는 뜻으로 자리를 비켜주면 거부하지 않고 그곳에 앉아 휑하던 제 옆을 채워주었다. 오래 전, 말없이 자신의 옆자리를 채우고 있던 사람의 기척과 비슷해 가끔씩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자신은 아직 스푼 사원이고, 제 옆에 있는 사람은 사사인 것 같은, 그런 아득하고도 멋 옛날의 일. 사사,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송하를 멀찍이 떨어져서 보다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사사가 송하의 손가락에 감긴 밴드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저번주였나, 앞이 보이지도 않으면서, 장난처럼 검을 휘두르던 습관이 남아 있었는지 칼을 뽑아들고 몇 번 휘두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동작은 한없이 가벼워보이면서도 상당히 재빨라서 보는 사람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아직 실력은 죽지 않았구나, 하고 감탄을 했는데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오른손에 든 칼로 자신도 모르게 왼쪽 손을 스치는 모습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대충 옷자락에 닦아내는 모습이, 그 덤덤한 모습이 싫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약국 앞에 서 있더랬다. 들어갈까 말까, 몇 번을 망설였다. 고작 손을 다쳤을 뿐인 것을. 손을 다친 적을 위해 약국에까지 달려오다니, 내가 이상해진 게지. 알아서 하겠지. 알아서 치료를 할 거라고 애써 생각을 해보았지만 약국 앞에 선 채 발걸음을 떼지를 못했다. 송하라면 그 손을 치료조차 하지 않고 내버려둘 것 같았다. ...갈색 피부의, 약간 거칠기는 해도 정갈해보이는 그 손이 참 좋았었는데.
결국에는 밴드 한 통을 사들고 송하 쪽으로 걸음을 하게 되었다. 덥석 손을 잡자 손을 빼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몸짓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사가 송하의 손에 기어코 밴드를 덕지덕지 붙여 놓았다. 사실은 붕대와 소독약을 사오고 싶었지만, 그건 아무리 봐도 이상해보일 것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밴드를 사왔다는 상황은 누가 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사온 것이 밴드였다. 통 안에 든 밴드를 거의 반 이상을 쓴 후에야 사사가 송하의 손을 놓아주었다. 밴드가 꼼꼼하게 붙여졌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톡톡 두드려보기까지 했다. 남은 밴드는 너 가지라는 뜻으로 살며시 송하의 오른손에 쥐어 주었다. 혹시라도 또 다치게 되면, 참지 말고 이거라도 이용하길. 오랜만에 받아보는 타인의 보살핌에 송하는 어색해 몸둘 바를 몰랐다. 너무도 오랜만에 받아보는 배려 때문에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을 잊어버릴 뻔했다. 제 손에 쥐어진 밴드 통을 붙들고서 입을 열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어색한 말투로 감사하다며 송하가 말을 건넸다. 제 옆에 앉으라는 듯이 몸을 옆으로 움직이길래 자신도 모르게 그곳에 앉게 되었다. 불안한 얼굴로, 혹시나 몸이 닿을까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기는 했지만 잠시나마 옛날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와 함께 휴식을 즐기는 것 같은, 달콤하면서도 쓰디쓴 착각. 그 착각이 진짜라면 좋을텐데.
그날 이후, 송하를 공격하겠다는 마음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 그래, 인정하자. 나는 더이상 그를 공격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히어로로서, 비록 옛 동료이긴 하지만 지금은 적이 되어버린 자를 어째서 공격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해서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사사가 제 옆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는 송하를 쳐다 보았다. 송하, 솔직히, 이제는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불쑥 밀려오는 죄책감에 주머니에 넣어둔 총에 손을 갖다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번번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게 되는 이유는, 그 눈동자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초록색의 눈동자. 이제는 더이상 앞을 볼 수가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송하의 눈은 제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빛을 보지는 못하더라도, 눈동자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이리저리 헤매던 시선이 어쩌다가 자신 쪽을 향하기라도 하면 손의 힘이 풀리곤 했다. 참 멍청하고, 바보 같지. 우리가 적이 된 지금에서까지 어째서 나는 아직도 네게 휘둘리고 있는 것인지.
다음편 예고:
"사사."
참으로 어이 없게도, 그동안 그토록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들켜버렸다.
"사사 맞습니까."
어둠 속을 걷다 7
습관처럼 찾은 공원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송하는 언제나처럼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고, 곁에는 몇몇 아이들이 달라붙어있었다.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중인가. 아니, 결코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이들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기묘한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의 대상은 송하임에 틀림이 없었다. 송하는 제게 달라붙은 아이들에 둘러싸여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대체로 순진하고, 반짝인다. 하지만 때때로 그들이 보여주는 잔인한 모습은 주변인들을 섬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던지는 잔인한 질문에 송하는 몇 번이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질문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되어 송하를 겨누었다.
"정말 눈이 안 보여요?"
"봐봐, 내가 그랬잖아. 이 사람, 진짜로 눈이 안 보인다고."
"와, 신기하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원래부터 그런 거에요?"
"지금 내가 손가락을 몇 개 펼쳐들고 있게요?"
당황한 송하가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일어섰다. 오늘은 늘 제 곁에 앉아있어주던 사람이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 대신 순진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지닌 아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송하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송하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의해 넘어질 뻔했던 그를 누군가가 붙들어주었다. 아이들의 눈길은 송하를 붙든 사사에게 향했다. 그들은 일제히 사사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어, 그 쪽은 누구에요? 이 사람 친구에요?"
"잘 됐다, 그러면 대답 좀 해주세요. 이 사람은 원래부터 이랬어요?"
"이 쪽은 눈이 안 보이고, 그 쪽은 말을 못 하는 거에요?"
원체 화를 잘 안 내는 사사였지만 이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들은 순진하다. 하지만 동시에 잔인하기도 했다. 지금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한없이 잔인한 면모였다. 대충 손을 휘저으며 가라는 시늉을 하고 있는 사사를 향해 아이들이 제각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근데,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날개를 봐, 까맣잖아.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악마는 날개가 까맣댔어."
"보니까 눈도 까맣고, 머리카락도 까맣고, 날개도 까매. 진짜 악마인가?"
날개가 있다, 까만 날개가. 눈도, 머리카락도 까맣다. 아이들의 묘사를 들은 송하의 몸이 굳었다. 설마 제 옆에 있는 사람은 사사인 것일까. 제 손에 붙들린 송하가 굳은 것을 느낀 사사는 아차 싶었다. 아이들은 구체적으로 사사를 묘사하기 시작했고, 송하는 이제 의심이 아니라 확신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사사가 맞았다.
"사사."
참으로 어이 없게도, 그동안 그토록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들켜버렸다. 그동안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들키게 되다니. 당황해서 손을 내젓던 행동을 멈추고 있던 사사가 이윽고 다른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일단 몰려든 아이들한테서부터 벗어나서 얘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쫓아올 것 같았는데, 다른 재밌는 것을 찾은 건지 아이들은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 사사가 걸음을 멈추자 송하 역시 따라서 걷는 것을 멈추었다. 사사. 다 알고 있지만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송하가 설마, 싶은 심정으로 질문을 했다.
"사사 맞습니까."
"...응."
이제 와서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봐야 무엇하나. 사사는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고, 그동안 제 옆에 있어온 사람이 사사였다는 것에 대해 송하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저 역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 맞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대로 공격을 해야 할까. 마음보다도 몸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검을 칼집에서 빼내려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예전에는 절대 안 하던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고, 검은 칼집에 넣어진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칼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인 송하보다 사사의 동작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칼을 집어든 사사가 다른 손으로 송하의 팔을 잡았다. 그동안 많이 야위었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될 정도인 줄은 몰랐다. 칼을 떨어뜨리다니, 그 잘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송하가 그런 실수를 하다니. 칼을 다뤄본 적이 없는 사사 자신도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송하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영양 보충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송하를 붙잡은 그대로 사사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음식점들 중에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던 사사가 근처 국밥집에 들어섰다. 왜 하필이면 국밥집을 선택했나 묻는다면, 눈이 안 보이는 송하한테는 그것이 가장 편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젓가락질을 해야 하는 국숫집이나 수많은 반찬이 나오는 음식점은 송하에게 한없이 불편한 곳일 터. 숟가락질 한 번으로 음식을 떠먹을 수 있는 국밥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붙잡은 사사의 팔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송하였지만 이렇게 무작정 따라갈 수는 없었다. 안 가겠다고 뻗대다가 사사가 던진 한 마디에 머뭇거리게 되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어디로 가면?"
어디로 가면, 네가 어떡할 거야? 여기서 사사가 자신의 손을 놓아버린다면, 왔던 곳으로 혼자서는 어떻게 돌아갈 방도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칼은 사사의 손에 있으니, 도망을 친다고 해도 칼이 없는 한 떳떳하게 나이프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체념한 송하가 얌전히 사사를 따랐다. 아까와는 달리 자신을 따라 걷고 있는 송하를 사사가 힐끔 쳐다보았다. 사실은 그것마저도 염두에 두고 물은 질문이었다. 송하의 칼은 자신에게 있었고, 눈이 안 보이니 어떻게 돌아갈 수도 없겠지. 사사는 송하를 어렵지 않게 식당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멋지게 싸움을 벌이는 대신 둘은 가운데에 테이블을 두고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벽에 붙은 메뉴들을 쳐다보며 사사가 입을 열었다.
"여디는 머가 있냐면."
지금 우리가 온 곳은 국밥집이야. 여기는 뭐가 있냐면, 도가니탕이 있고, 소머리 국밥이 있고. 메뉴들을 하나하나 읊어주는 사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송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는 자신이 사사 대신 주문을 하고, 말을 했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은 모두 자신의 몫이었건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 하시겠어요? 하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까지 사사한테서 들은 메뉴들을 토대로 송하가 음식을 주문했다.
"소머리 국밥으로 하겠습니다."
"음식은 하나만 시키실 건가요?"
그 질문은 사사에게 던져진 것이었고, 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음식이 나오고, 송하는 맛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송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색하게 숟가락질을 하고 있는 송하를 사사가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러고보니 상당히 수척해져 있었다. 그런 주제에 칼을 들고 공격을 할 생각을 하다니. 하려면 잘 좀 할 것이지, 그런 모습을 보여서 사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면 어떡하나.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식사를 마친 후 둘은 다시 공원으로 오게 되었다. 자, 하고 제 손에 다시 들려진 칼을 받아들이려다가 말고 송하가 말을 했다.
"지금 이대로 사사를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것을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사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아라."
"차라리 이대로 스푼으로 끌고 가는 것이 사사한테 이득일텐데요."
그것도, 알고 있다.
"어째서 그러지 않는 겁니까."
그러게, 어째서 그러지 못하는 것일까. 잠시 머뭇거리던 사사가 조용히 대답을 해왔다. 바보 같이, 옛정이 남아서. 제대로 칼을 잡지도 못하는 모습에 기분이 이상해서. 그 대답에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은 송하였다. 뭐가 어찌되었든 간에, 다음에 만나면 네게 총을 들이댈 거야. 붙잡고 있던 칼에서 손을 뗀 사사가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사는 그 후로 공원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송하를 본다면 그때는 정말 공격을 해야 할 테니. 송하 역시 공원을 찾는 것을 그만두었다. 혹시나 사사를 만날까 싶어서, 사사가 치료해준 손으로 칼을 들이대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 달갑지 않아서.
다음편 예고:
"송하, 그거 알아?"
"뭘 말씀하시는 건지..."
"네 눈빛, 죽어 있어."
예전에는 빛났는데. 이걸 뭐라고 하더라, 썩은 동태 눈깔이라고 하나. 아무튼, 안 됐다, 진짜로.
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죽었대. 눈빛이 죽어있대. 사사가 보기에도 그랬으려나. 내가 그렇게 불쌍해보였나, 그래서 그날 나를 죽이지 않고 보낸 건가.
어둠 속을 걷다 8
아마도 창문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쪽으로 송하가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날씨가 어떠려나. 세찬 바람 소리나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는 않을까 싶어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밖에 나가지 않은지 꽤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허한 기분이 들었다. 밖에 나가 있기라도 하면 그나마 괜찮은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갈 곳은 공원 뿐이었고, 이제는 그마저도 스스로 발길을 끊은 참이었다.
심심해, 아, 진짜 심심하다. 주위 사람 들으란 듯이 크게 외치던 백모래가 송하에게 다가갔다. 이제부터 수다를 떨 생각이었는지 송하를 붙들고 아무 말이나 던지고 있었다. 수다의 주제는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랩터가 되기도 했고, 고양이가 되기도 했고, 내일 아침 식사 메뉴가 되기도 했다. 송하의 눈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던 백모래가 신기한 듯이 송하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마치, 빛을 잃은 초록색 공 같았다.
"그런데 송하, 눈이 안 보이는 기분은 어때?"
느닷없이 던져진 질문에 송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입을 열어 겨우 대답을 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불편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멀쩡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이렇게 된 걸 보면."
백모래는 저 하고 싶은 말을 아무렇게나 툭툭 내뱉기 시작했다. 그 말에 상처를 입어야 하는 것은 송하였다. 유달리 충성심이 강한 송하였기에 묵묵히 백모래가 던지는 말들을 참아내고 있었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진이 빠지고 있었다.
"송하, 그거 알아?"
"뭘 말씀하시는 건지..."
"네 눈빛, 죽어 있어."
예전에는 빛났는데. 이걸 뭐라고 하더라, 썩은 동태 눈깔이라고 하나. 아무튼, 안 됐다, 진짜로. 그 다음에 백모래가 하는 말은 송하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의미 없는 소음이 되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눈빛이 죽어 있어, 안타깝다. 이 말만이 반복해서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백모래가 뱉어낸 말들에 상처를 입었건만, 백모래는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날린 셈이었다. 이대로 백모래의 나머지 말들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며칠동안 스스로 바깥 출입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나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가봤자 갈 곳은 딱 한 곳 뿐이었다. 공원. 그곳에 가서 사사를 만나든, 싸우든 간에 이곳에서 백모래와 마주하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송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나섰다. 오랜만에 맞는 바람이 송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겨우 도착한 공원에는, 송하는 몰랐지만, 사사가 있었다. 송하를 본 사사가 머뭇거리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저번에 한 말, 다음에 만나면 네게 총을 들이댈 거야, 라는 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상기해내면서. 또한, 히어로로서 적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송하의 중얼거림이 사사의 귀에 들려오는 순간 총을 쥔 손의 힘을 풀 수 밖에 없었다. 그토록 표정 한 번 변하지 않던 송하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죽었대. 눈빛이 죽어있대. 사사가 보기에도 그랬으려나. 내가 그렇게 불쌍해보였나, 그래서 그날 나를 죽이지 않고 보낸 건가.
송하, 하고 저도 모르게 부르고 말았다. 놀랍게도 송하가 그 부름에 대답을 했다. 대답을 한 것 뿐만 아니라 질문까지 던져오고 있었다.
"사사, 말해주십시오. 제 눈이 정말 그래보였습니까?"
저도 이렇게 되기는 싫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동안 애써 참아왔던 불안감이며, 두려움을 한순간에 폭발시키듯 송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울 것처럼 입술을 깨물던 송하가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눈에서는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우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울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울어본 적이 거의 없는 송하로서는 이 감정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기묘한 표정을 보던 사사가 결국 총을 내려 놓았다. 울어, 울고 싶으면 울어. 송하의 곁에 쪼그려 앉은 사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예전만큼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는 아니어도 그 말은 촉진제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송하가 사사를 붙들고 서툴게나마 제 감정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팔을 붙든 채 울고 있는 송하의 등을 쓸어주며 사사가 송하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주었다.
다음편 예고:
"다음에 만나면 제게 총을 들이댈거라고 했지요. 우리는 이렇게 또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절 죽일 겁니까?"
"...아니."
"어째서입니까?"
어둠 속을 걷다 9
사사도, 송하도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앉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눈물은 멎은지 오래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송하였다.
"다음에 만나면 제게 총을 들이댈거라고 했지요. 우리는 이렇게 또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절 죽일 겁니까?"
사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비록 송하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에게는 그럴 뜻이 없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아니."
"어째서입니까?"
그 이유는 자신조차도 파악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옛 친구로서의 정이 남아 있어서? 그걸로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었다. 송하를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는 것, 싸우기가 겁이 난다는 것. 사사가 내놓은 타협안은 이것이었다. 스푼과 나이프의 싸움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싸우지 않겠다. 거리에서 대놓고 널 죽이고 싶지도 않고, 스푼으로 끌고 가는 것도 싫다. 사실은 너랑은 싸우고 싶지 않다는 것을 내포한, 최대한 에둘러 한 말이었다. 그 뜻을 송하 역시 짐작하고 있었기에 더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휴전 협정이 내려졌다고 봐도 좋았다.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도 아닌 상태였다.
"왜 지금까지 저를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보이지도 않으니 제압하는 건 쉬웠을텐데 말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으니까. 방금 사사가 내놓은 타협안에 반하는 질문이었고, 사사가 대답을 한 후에야 송하는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군요."
"응."
사사와 헤어지고 난 후 송하가 밖을 나서기 전까지는 무거웠던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위안이 되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비록 지금은 어느 쪽이라고 단정 짓기 어렵기는 해도, 한때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다소나마 제 편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은 송하에게 상당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이 상황에서 사사에게 기대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기대고 싶을 만큼 자신은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써주지 않고, 하루하루 불안감을 억누르며 살아가고 있던 도중 사사는 제게 찾아온 하나의 구원과도 같았다.
며칠이 지난 후 오늘도 심심하다며 백모래는 자신의 무료함을 해소해 줄 대상으로 송하를 골랐다. 대화의 주제가 이리저리 오고 간 끝에 백모래가 선택한 것은 역시나 송하의 눈에 관한 것이었다.
"진짜 안 보이는 거지? 거짓말 하는 거 아니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송하의 대답에 백모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네, 정말 그렇겠네. 백모래는 유독 자신의 눈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마치 저번에 공원에서 만났던 아이들같았다. 천진함을 가장한 잔인함을 백모래 역시 보여주고 있었다. 아, 그것과는 좀 다른 건가. 이 쪽은 다 큰 성인이고, 그 쪽은 어린 아이들이었으니. 그러나 양측 모두 제게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백모래가 몇 번이고 송하의 눈 상태에 대해 질문을 했다. 묘하게 발랄한 말투로 던지는 질문에 송하는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 대답을 들려주었다. 말투에 섞인 경쾌함과 즐거움에 몇 번이고 가슴에 칼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보스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 것일까. 뭐가 그를 이렇게 신이 난 말투로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자신의 상태를 지루한 일상에 일어난 하나의 사소한 사건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식탁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메두사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오르카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보스, 무슨 좋은 얘기라도 하나? 송하랑 얘기하는데 계속 웃고 있던데."
"보스가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몰라. 하여간 좋겠어, 저렇게 즐거워서."
아마 보스가 이 아지트에서 제일 즐거운 사람일 거야. 누구는 이 촌구석에서 쇼핑 한 번 제대로 못해서 말라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지. 메두사의 투덜거림에 오르카가 그거 안 됐다며 서툰 위로를 건넸다.
어둠 속을 걷다 10
"오빠, 무슨 생각 해?"
"...아무거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하고 혜나가 중얼거렸다. 사사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은 무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할 때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혜나의 중얼거림은 사사에게 가 닿지 않았다. 선배한테 무슨 생각할 일이 있나보지, 하고 나가가 혜나를 붙들었다. 이것 좀 놓으라며, 사사가 고민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해야 하지 않겠냐고 외치는 혜나를 염력을 이용해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당사자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모르는 척 놔두는 게 좋은 거야. 그 말을 들은 혜나가 그런 거야? 하고 되물었다. 응, 그런 거야, 하고 대답해주니 그제서야 얌전하게 발을 까딱거렸다. 가끔 보면 혜나는 시한폭탄 같았다. 서장님 동생이라서 그런가. 사사가 깊이 생각에 빠질수록 진땀을 빼야 하는 것은 나가였다. 사사를 이렇게까지 생각에 잠기게 만든 문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그 문제가 해결되길 바랬다.
턱을 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스푼과 나이프의 싸움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싸우지 않겠다니. 어째서 불쑥 그런 말을 해버린 것일까. 히어로의 본분을 다 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사사를 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송하와 싸우고 싶지 않다는 마음 역시 진심이었다. 단순히 정 때문이었을까. 정 같은 것이라면 이미 오래 전에 잘라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정 때문이라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 뭔가가 무엇인지 선뜻 알아내기가 두려웠다. 자신이 감당해내지 못할, 제 팀원들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할 무언가일까봐. 공원으로 가지만 않는다면 송하와 마주치는 일은 없다. 오늘은, 오늘만이라도 공원으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매번 그 결심이 무너졌다. 점심 시간만 되면 공원으로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 오늘도 송하는 공원에 있었고, 그 모습을 보자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왔습니까."
송하, 하고 부르기도 전에 송하가 사사에게 말을 걸었다. 응, 하고 사사가 대답을 했다. 어떻게 된 게 단 한 번도 먼저 송하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먼저 송하가 저를 불렀다. 눈이 보였을 때도 주위에 퍽 예민하게 반응을 하던 송하였지만 지금은 더욱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송하의 곁에 앉으며 사사가 물었다.
"오느른 머하고 이써떠?"
"그냥 이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둘 사이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송하의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지나간 바람은 이어서 사사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문득 송하의 옷차림에 시선이 갔다. 와이셔츠에 조끼라니, 저렇게 입으면 안 춥나.
둘 사이에 애매한 휴전 협정이 맺어진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송하로서는 그나마 세상이 살 만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습게도,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적한테서 위로를 얻는다, 그리고 위안을 받는다, 라. 예전의 자신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이건 위험한 상황이라고 아무리 자신을 채찍질해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의 자신에게 남은 것이 대체 무엇이 있나. 이 위태로운 휴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젠가 사사가 그 휴전 협정을 깨고 자신의 머리에 총을 들이댈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신은 그에 대한 답으로 칼을 휘둘러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숨을 쉬고 싶었다. 나이프 아지트에서 내뱉는 불안스러운 숨이 아닌, 다소나마 마음이 편한 그런 숨을.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는 송하를 보다가 사사가 눈길을 거두었다. 너는 불안하지도 않은가 보았다. 제 곁에 있는 사람이 언제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평온한 얼굴을 할 수가 있다니. 아니면 너는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일까. 언제 끝이 다가올지 모르는 이 불안한 상황을. 문득 송하가 눈을 떴다. 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할까 싶어 사사가 부러 고개를 먼 곳으로 돌렸다. 그 눈만 보면 언제나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편 예고:
꿈을 꾸었다. 시력이 돌아오는 꿈을. 아주 오랜만에 보는 사사의 얼굴이 반가웠다. 적이라고 할 수도, 친구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존재는 여전히 자신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어둠 속을 걷다 11
송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직 새벽인 건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햇살은 느껴지지 않았다. 햇빛 대신 어둠이 송하를 맞아주었다. 몸을 웅크린 채 아까의 꿈에 대해 생각했다. 꿈이었지만 꿈이지 않길 바랬던 그 허상을.
꿈을 꾸었다. 시력이 돌아오는 꿈을. 아주 오랜만에 보는 사사의 얼굴이 반가웠다. 이마를 다 가린 앞머리를 만지며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휘어지는 눈꼬리가, 그 눈빛이 좋았다. 이제는 적이라고 할 수도, 친구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존재는 여전히 자신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자꾸만 헷갈렸다. 자신이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눈이 보이던 때인지, 아니면 사사와 함께 있던 때인 건지. 사사와 함께 있던 시절을 그리워하다니, 옛날에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해졌던가. 스푼과 나이프, 둘 모두에 마음을 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온 것 같았다. 이 어중간한 마음을 어떡해야 할까. 사사를 만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공원으로 가지 않는다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리고 자신은 언제나처럼 나이프의 일원으로서 행동을 하면 될 일이었다.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 안 된다.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마음 탓에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상처를 입는 것은 자신이 될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제 자신을 몰아붙여봐도 아침마다 공원을 찾게 되고야 말았다. 그 곳에서 사사를 기다리게 되었다. 햇살이 강렬해지는 오후에는 언제나 사사가 자신을 찾아왔다. 그 강렬한 햇살 속의 오후는 자신에게 꿈 같은 시간이 되어주었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옆자리를 채워주는 온기에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았다. 아, 오늘도 와주었구나. 송하가 입을 열어 사사를 부르려다가 그만두었다. 저번부터 계속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하지만 매번 용기를 내지 못해 묻지를 못했다. 제 눈빛이 정말 죽어 있습니까. 더이상 예전 같지 않은 겁니까. 내 기억 속의 당신은 더없이 좋은 눈빛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의 저는 사사에게 어떤 느낌을 주고 있습니까.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송하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사, 제 눈빛이 정말 죽어버린 것처럼 보입니까."
뜬금없는 물음에 사사가 송하를 보았다. 송하가 자신의 눈길을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을 잠시 잊은 채였다. 대답 없는 사사를 두고 송하가 변명을 하듯, 답지 않게 어물거렸다.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예전처럼 앞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보기에 썩 좋지는 않겠지요. 다시 마주친다면 총을 들이댈거라는 말에 공원을 찾는 것을 그만두었더랬다. 그러나 자신은 백모래의 무심한 말에 그 자리를 뛰쳐나와 또 한 번 사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제 눈이 정말 그래보였습니까, 하는 물음에 사사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다.
"아니."
그 대답에 맥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과연 사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 함부로 막말을 하지 않는 사사였으니 제게 그렇게 말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위로 안 해줘도 됩니다."
진짜로 그런데, 하고 사사가 대답했다. 서툰 위로 같은 것이 아니었다. 초점을 맞추지 못해 흔들리는 시선에서조차도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랬다. 항상 그래왔다. 송하는 지금도 여전히, 옛날과 똑같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 눈빛에 반응하게 되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그 눈과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예전처럼, 둘이 같이 있던 그때처럼. 사사가 그 말을 꺼내자 송하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그렇게는 못 한다는 거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은 저도 그러고 싶었다. 어젯밤의 꿈처럼 사사를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시력이 돌아온다는 믿음을 가질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할 수 있어. 내가 네 얼굴을 붙잡고 너는 딱 정면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시선을 주면 돼. 비록 네가 직접 보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볼 수 있으니까 괜찮아. 그 말에 송하가 아주 작게 웃었다. 사사의 생각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승낙의 뜻으로 송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이어 자신의 얼굴을 붙든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더없이 오랜만에 마주한 초록색 눈동자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아주 오래 전부터 송하를 좋아해왔을지도 몰랐다. 이제껏 총을 쏘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다. 아직까지도 송하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동시에 야속함이 밀려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나이프에 간 것인지 묻고 싶었다. 계속해서 내 옆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만약 그랬다면 이리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이렇게 되었더라도 내가 계속해서 챙겨줄 수 있었을 텐데.
어둠 속을 걷다 12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된 거지? 맨 처음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때 어땠는지 생각나? 마지막으로 눈이 보였을 때 넌 그날 뭘 하고 있었어? 혹시나 송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될까 싶어 사사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건드리기에 민감한 주제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쩌면 눈이 멀게 된 원인을 파악해내고 다시 시력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무래도 나이프 일원들은 송하를 도와줄 것 같지가 않으니 자신이라도 원인 파악에 나서보겠다는 마음으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평소하고 다르지 않게 하루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틀림없이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거라는 사사의 말에 송하가 애써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눈이 안 보이게 된지도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앞을 볼 수 있었던 날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날 자신이 무엇을 했었던가. 사사의 말대로 평소와는 다른 일이 있었을까? 다른 때보다 흐릿해진 시야에 비쳤던 아지트 가득한 고양이들, 쇼파에 앉아 무료한 얼굴을 하고 있던 메두사, 그리고 백모래의 실없는 웃음. 수련을 하고 돌아온 뒤 백모래의 부탁에 고양이를 돌보고, 먹을 것을 먹고, 마실 것을 마신 그저 평범한 하루. 전혀 짚이는 점이 없었다. 송하가 고개를 젓자 사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없다면 없는 거겠지.
"...그래."
아지트로 돌아가는 내내 송하가 그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날은 평범한 하루였다는 사실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송하, 고양이 좀 돌봐줘.'
'먹이만 주면 되는 겁니까?'
'응.'
고양이 사료를 자신에게 쥐어주는 백모래의 모습 뒤로 보이는 메두사와 오르카의 모습.
'진짜 심심해죽겠네.'
'메두사 님, 저번에 사온 디비디는 어쩌시고...'
'그거 사온지가 언젠데, 벌써 다 봤지.'
'고양이 돌보느라 수고했어. 자, 마셔.'
'감사합니다. ...냄새가 독특하군요.'
'그렇지? 메두사가 요즘 즐겨 마시는 쥬스라던데 냄새가 좀 그렇긴 해.'
'그게 냄새가 어떻다고요? 그리고, 쥬스가 언제 이렇게 줄었나 했더니, 보스가 다 마신 거에요? 이거 사러 나가기 귀찮단 말이에요!'
'어차피 메두사가 직접 가는 게 아니라 오르카한테 시키는 거면서!'
백모래, 메두사, 오르카,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섞였다. 왁자지껄했던,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 줄은 몰랐던 그날.
아지트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지트 출입문이 대충 여기쯤에 있을 거라고 짐작한 송하가 손을 뻗었다. 문고리가 여기 어디쯤에 있을텐데. 손으로 문을 더듬자 곧이어 문고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 이제는 사사의 목소리보다도 더 익숙해진 나이프 일원들의 목소리들이 들렸다.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온전히 마음을 줄 수 없는 그들의 목소리. 사사와 있었던 몇 분 전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다 흠칫했다. 지금은 저들이 자신의 동료였고, 사사야말로 적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완벽하게 적 혹은 아군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피로감이 느껴졌다. 대체 어디에 마음을 붙여야 할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음을 붙여야 할 곳은 현재 소속 되어 있는 곳이라고. 그러나 마음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불안한 마음은 백모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더욱 강해졌다.
"오늘은 좀 늦었네?"
"아, 네. 조금 늦었습니다."
"오르카가 지금 저녁 하고 있으니까 같이 밥을 먹을 순 있겠다."
"그거 다행이군요."
정신 차리자. 이곳이 바로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곳이었고, 마음을 붙여야 할 곳이었다. 다른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되었다.
어둠 속을 걷다 13
따분해하는 메두사에게 그러면 모두 같이 영화라도 볼까, 하고 백모래가 제안을 했다. 이제까지 반복해서 본 영화가 몇 개인 줄이나 아냐며, 이제는 대사도 다 외울 지경이라는 말에 백모래가 반박했다.
"혼자 보는 거하고 같이 보는 거하고는 다르지! 거실의 불을 끄고 다 같이 공포영화를 보면 느낌이 다를 거야."
"그건 좀 괜찮게 들리네요. 근데."
모두의 눈길이 자신에게로 꽂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송하도 같이 보면 되지. 아니면 내가 영화 내용을 설명해줄 수도 있고."
자기 딴에는 송하를 왕따 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은 건지 백모래가 송하 대신 대답을 했다. 송하 역시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장면을 봐야 이해가 가는, 두뇌게임을 요구하는 영화도 아니고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뭔가가 튀어나오는 것이 대부분임을 모르지 않았다. 공포영화는 어차피 거기서 거기일 테니, 보지 않고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비명을 지르고 뭔가에 찔리는 소리가 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측이 가능했다. 영화 내용을 설명해주겠다고 자청했던 백모래는 어느새 입을 다물고 영화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이 일도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백모래에게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백모래에게 뭐라고 할 처지도 아니었지만은. 곁에서 연신 으, 으, 하고 신음을 내뱉던 백모래의 목소리가 차차 잦아들었다. 이제 영화가 끝난 것인지 음산한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내내 숨죽여 영화를 보고 있던 오르카가 중얼거렸다.
"정말 무섭군요.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집이었는데 저렇게 바뀐다고 생각하면..."
"그치? 몇 번을 돌려봐도 그 장면은 소름이 끼친다니까. 설마 그때 열어봤던 상자 안에서 안 보이는 무언가가 튀어나왔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고작 상자 하나를 열어봤다고 저런 일이 벌어지게 될 줄은 누구도 짐작을 못 했을 것 같네요."
"내 말이. 아주 사소한 일이었을 뿐인데 말이야."
오르카와 메두사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백모래가 끼어 들었다.
"사실은 그게 가장 위험한 거 아니야? 일상의 배제라는 게. 평소하고는 다른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잖아. 그 일이 뭔가를 바꿔놨을지 어떻게 알아."
설령 그 일이 아주 사소한 거였더라도 말이야. 덧붙인 말이 의미심장했다. 백모래는 아무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겠지만, 자신은 그 말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현재 자신의 상황과 정확히 맞물리는 말이었기 때문에. 몇 번이고 그날을, 그때 했던 행동을 되짚어보았다.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나? 혹은 평소처럼 행동했던 것에 자연스럽지 않은 무언가가 섞여 있었던가?
'송하, 고양이 좀 돌봐줘.'
'먹이만 주면 되는 겁니까?'
'응.'
고양이 사료를 자신에게 쥐어주는 백모래의 모습 뒤로 보이는 메두사와 오르카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진짜 심심해죽겠네.'
'메두사 님, 저번에 사온 디비디는 어쩌시고...'
'그거 사온지가 언젠데, 벌써 다 봤지.'
손질한 손톱을 매만지던 메두사와 어떻게든 뭔가 할 것을 찾아내주려던 오르카.
'고양이 돌보느라 수고했어. 자, 마셔.'
'감사합니다. ...냄새가 독특하군요.'
'그렇지? 메두사가 요즘 즐겨 마시는 쥬스라던데 냄새가 좀 그렇긴 해.'
'그게 냄새가 어떻다고요? 그리고, 쥬스가 언제 이렇게 줄었나 했더니, 보스가 다 마신 거에요? 이거 사러 나가기 귀찮단 말이에요!'
메두사가 요즘 즐겨 마시는 쥬스라며, 고양이를 돌보느라 수고했으니 마시라고 하며 백모래가 건네주었던 머그컵. 잔 안에 들어 있던 주황색 액체. 반쯤 빈 쥬스병을 흔든 후 백모래의 어깨를 잡아챈 메두사. 맞을 것임을 짐작했는지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쥔 뒤 항변하는 백모래.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몰라 쩔쩔매던 오르카.
'어차피 메두사가 직접 가는 게 아니라 오르카한테 시키는 거면서!'
백모래의 말을 마지막으로 그날의 기억은 여기서 끝났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희미해져가는 기억들을 더듬어보려니 머리만 아팠다. 조금 더 먼 기억들을 더듬어봐야 하려나. 그날 아침이, 혹은 그 전날의 저녁이 문제였을까. 그날 아침, 수련을 가기 위해 나서던 자신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던 오르카가 떠올랐고, 자신의 발치에 머물던 검은 색 고양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송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네."
"영화 재밌었지?"
가벼운 웃음을 실은 목소리를 들으며 송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질문을 그렇게 해요? 그리고 송하한테 영화 설명해준다더니 하나도 안 해줬죠?"
"아, 잊고 있었어."
메두사의 비난과 송하 미안, 하는 사과가 들렸다. 그러나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괜찮습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송하의 목소리는 메두사에게 맞을까봐 저 멀리 달아난 백모래에게 닿지 않았다.
어둠 속을 걷다 14
"송하, 힘들어? 눈이 안 보이는 채로 사는 거?"
힘들어도 힘들다고 쉽게 말을 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제 속마음과는 달리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대답, 건조한 말투. 사사 외에는 아무도 그 안의 숨은 의미를 파악해내려 애쓰지 않았던 자신 특유의 말투에 백모래는 간단히 대답을 해주었다.
"예전보다는 좀 그렇지만, 어떻게든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송하는 강하니까 괜찮을 거야."
실력도, 감정을 다루는 능력도 강하니까. 백모래가 가볍게 치고 지나간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예전 같았다면 그 말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백모래가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칭찬이자 신뢰가 담긴 말로 받아 들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자신에게는 한없이 버거운 말이었다. 속해 있는 집단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기력한 모습과 적에게 기대고 있는 자신에게 환멸마저 느끼고 있는 지금은 저 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그런데, 내일도 나갈 거야?"
내일도 나갈 거야, 라는 질문은 매일 계속되는 공원 산책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송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보이지 않지만 백모래에게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일 것이었다. 송하의 단순한 대답에 백모래가 흠, 하고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괜히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백모래가 자신의 산책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지는 않을까 싶었다.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군가가 스푼 일원이자 옛 동료라는 것을 사실은 백모래는 이미 눈치 채고 있지 않을까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라는 말과 함께 백모래가 송하를 놓아주었다. 백모래가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송하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배가 고프다며, 오늘 저녁에는 맛있는 걸 먹고 싶으니 특별 메뉴를 해주지 않겠냐는 백모래의 말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저녁 메뉴들을 중얼거리는 오르카의 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침대에 엎드리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피곤하다. 요즘은 자신을 지치게 하는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동하."
자신을 가볍게 건드리는 손길과 함께 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박 잠이 들었나 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침대에 엎드려 있었던 것 같은데, 몸은 어느새 공원에 있었다. 아니, 침대에 있었던 것은 어제 일이었던가. 쫓기듯 밖에 나가 시간을 때우고 저녁이 되면 돌아오고,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몸도, 마음도 안정이 되지 못해 하루하루가 너무도 피곤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매일을 살아가려니 힘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어제와 오늘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었다.
"피고내써?"
"아닙니다."
가벼운 걱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에 하마터면 모든 걸 털어 놓을 뻔했다. 요즘 잠이 안 온다고, 새벽까지 잠을 설치는 일이 잦아졌다고. 하지만 더이상 그런 투정을 부릴 수는 없는 처지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피곤했냐는 질문을 받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시간에 위안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자꾸만 중심을 잃고 무너져 가는 제 모습이 우스웠다. 나이프와 사사, 어느 한 쪽에서 자신에게 뭐라고 해줬으면 싶었다. 중심을 잡지 못해 흔들리는 자신을 끌어내려 누군가가 호되게 야단이라도 쳐주었으면.
요즘의 송하는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말은 안 해도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포커 페이스가 무너지는 것을 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놀란 얼굴로,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해졌다. 누가 널 이렇게 긴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과연 네가 마음 편히 쉴 때가 있기는 한 것일까.
아까보다 햇빛이 누그러진 것을 느낀 송하가 중얼거렸다.
"햇빛이 조금 약해졌군요."
"응."
"이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푼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지 않았냐는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사가 가볼게, 하고 작게 대답했다. 사사가 떠난 자리에는 바람만이 남았다. 휑한 느낌에 문득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사사는 돌아갈 곳이 있지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곳이 내 자리가 맞을까. 씁쓸한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송하가 일어섰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곳에 억지로나마 마음을 붙이기 위해.
어둠 속을 걷다 15
"일찍 왔네. 산책이 재미 없었어?"
재미, 재미라. 재미가 있었다거나 없었다는 말로 쉽게 표현할 성질의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모래에게 자신이 하는 산책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햇빛이 강렬해 견디기가 어려웠다는 말로 산책에서 일찍 돌아온 이유를 정당화시켰다.
"하긴, 요즘 날씨가 더워지긴 했지. 식물 혼혈인 송하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더워졌나봐?"
"...네, 아무래도."
견디기 어려운 것은 더위가 아니라 흔들리는 마음이었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했다는 박탈감과 하는 일도 없이 마치 기생충처럼 달라붙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자괴감. 사사에게로 기우는 마음, 적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휴식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이런 마음은 위험했다. 한 번 배신한 걸로 족했다. 이곳이 마음에 안 든다며 원래 배신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우스운 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자신을 붙잡아 줄 사람이 없다면 혼자 그 방법을 찾아내는 수 밖에. 사사를 보지 않는다면, 공원에 가지 않는다면 마음이 안정이 될까. 다소 불안한 마음가짐으로라도 이곳에 마음을 붙인다면 해결될 문제일지도.
밤이 오고, 낮이 지나갔다. 달력을 확인할 수가 없으니 생체 시계로 시간이 흐르는 것을 가늠하거나 아침, 점심, 혹은 저녁 식사를 하라는 오르카의 말에 의지해 겨우 며칠이 지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억지로라도 정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에 며칠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답답했다. 나가고 싶었다. 사사는 아직도 벤치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자신이 나가지 않은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으니 이제는 공원에 오지 않으려나.
"오늘도..."
오늘도 송하는 공원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사사가 홀로 벤치를 지켰다. 어디를 다쳐서 못 오고 있는 것은 아닐지. 아니면 더이상 오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건지. 송하도 없는데 내일부터는 오지 말자, 하고 다짐을 해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다시 이곳에 오게 되었다. 송하가 내일은 벤치로 올까. 서로의 곁에 앉아 같이 시간을 보내는 날이 또 올까. 아니면 혹시 오는 시간대를 바꾼 건 아닐까. 저녁에도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가 어딘가에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에 송하가 일어섰다. 소리의 근원지는 자신의 방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백모래의 방 앞에 서자 어, 이게 깨졌네, 하는 백모래의 목소리와 함께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고양이가 뭔가를 깨뜨린 것 같았다. 뭐라도 도울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 열려 있는 문 앞에서 백모래를 부르려는 순간 독특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독특하면서도 친숙한 냄새.
"애기야, 그거 먹으면 안 돼. 위험한 거야. 까딱 잘못하면 눈이 멀 수가 있어요. 착하지, 응? 거기서 물러서자."
그러고 보니, 아직 눈이 보이던 그때, 세상을 볼 수 있었던 마지막 날에도 이 냄새를 맡았었던 것도 같았다. 단순히 냄새만을 맡은 것이 아니라, 뭔가 더 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고양이 돌보느라 수고했어. 자, 마셔.'
'감사합니다. ...냄새가 독특하군요.'
'그렇지? 메두사가 요즘 즐겨 마시는 쥬스라던데 냄새가 좀 그렇긴 해.'
그때 자신이 마셨던 것이 과연 평범한 쥬스였을까.
'와, 이거 어떡하지?'
'진짜 안 보여? 진짜?'
'우리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갑자기 눈이 안 보이게 됐다면 어느날 갑자기 시력이 돌아올지도 모르지.'
'뭐 어때? 어차피 술래가 되면 눈을 가려야 하는데, 송하는 그런 것도 필요 없고 좋잖아?'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멀쩡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이렇게 된 걸 보면.'
'네 눈빛, 죽어 있어.'
"어? 송하, 언제 왔어? 아, 이거 깨지는 소리 듣고 온 거야?"
우뚝 멈춰선 자신에게 건네오는 말소리가 들렸다.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운 목소리. 그 목소리로 백모래는 내내 말을 걸었었다. 독하게 마음을 먹고 밖에 나가지 않았던 날들이, 이곳이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을 걷다 16
"무슨 일 있나 싶어서 걱정돼서 보러 와 준 거야? 역시 송하 밖에 없네."
방으로 발걸음을 하는 자신을 백모래는 막지 않았다. 뭔가 찔리는 것이 있다면 이런 반응을 보일 수는 없을 텐데. 어쩌면 자신이 잘못 짚은 것일 수도 있었다. 단순히 냄새가 비슷한 액체일 수도. 그런데 이런 냄새의 액체가 흔할까. 방으로 더 깊숙이 들어설수록 예전에도 맡아본 냄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백모래 님이셨습니까."
"응?"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백모래의 말투에 가까스로 입을 열어 자신이 알고 싶은 것에 대해 질문을 했다. 질문을 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점차 꺼져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 눈을 이렇게 만든 것이 백모래 님이셨습니까."
"아, 그거."
백모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뭔가 사과할 말을 찾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이렇게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백모래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입안이 바짝 메말라갔다. 제가 뭔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래서 이런 벌을 준 겁니까.
"어째서... 제가 뭔가 잘못한 일이라도..."
"응? 아니, 송하는 아주 잘해주고 있어. 그렇게 한 건, 글쎄, 아무 이유 없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뭔가 이유라도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 이유를 납득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그래, 그렇구나, 하고서 억지로나마 순응할 수 있었을 터였다. 나이프의 일원으로서 어떻게든 살아나가려고 노력할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백모래는 아무 이유도 없었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백모래가 보여주었던 반응은 순수한 호기심과 자신의 실험이 정말로 성공했다는 신기함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짜 안 보여? 진짜?'
'처음 술래잡기는 송하가 술래!'
와, 진짜 안 보이는구나, 하는 듯한 느낌, 마치 실험용 쥐를 앞에 둔 사람 같았던 느낌. 목소리에 섞여있던 신기하다는 듯한 감정. 그 안에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은 눈이 보이지 않아 예민해진 감각 때문에 내렸던 섣부른 판단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자신이 느꼈던 위화감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둔했던 탓에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위험한 불장난으로조차도 치부될 수 없는, 한순간의 재미를 위한 장난감. 그 장난감은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대체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할까.
"...아무 이유도 없었다고요."
허탈함과 분노, 드물게도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뭐, 더 크게 다친 곳은 없으니까 됐잖아? 눈만 불편한 거잖아? 칼은 계속 쓸 수 있다며?"
자신의 말을 이용해가며 대꾸를 하고 있는 백모래의 말을 듣자 기가 막혔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한 사람의 눈을 망가뜨렸다. 검사에게는 눈이 더없이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건만, 그걸 아무 생각도 없이 망가뜨려버릴만큼 자신은 그에게 소속된 일원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뜻일까. 자신은 대체 백모래한테 뭐였을까.
"눈이 안 보여도 칼을 쓸 수 있다고 한 건 송하잖아."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눈을 망가뜨리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그건 미안해."
저 사과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자신의 추궁에 자동적으로 내뱉는 말일 뿐, 진심은 담겨 있지 않다. 메마른 입술을 깨물자 금방이라도 피가 날 것처럼 아릿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의 온도가 아까보다 높아진 것 같은 기분까지 들고 있었다.
"어? 불 난다!"
"오르카, 물 좀 갖고 와!"
메두사의 말과 함께 금세 차가운 물방울들이 옷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메두사랑 오르카는 또 언제 왔대?"
"목소리가 들려서 와 봤어요. 뭔가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서요."
"다 듣고 있었던 거야?"
"그런 셈이죠."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들어 있었다. 메두사와 오르카의 눈길은 평소와 다름 없어 보이는 백모래를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백모래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백모래는 정녕 미친 게 틀림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이프의 보스였고, 심사가 뒤틀리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항의를 하기보다 침묵을 선택했다.
별안간 송하가 몸을 돌려 불안한 걸음으로, 그러나 재빨리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송하를 따라가기 위해 오르카가 열린 현관문으로 반쯤 몸을 트는 순간 백모래가 태평한 목소리로 그 행동을 막았다.
"그냥 놔둬. 때 되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하지만... 혹시 돌아가기라도 하면..."
오르카가 불안한 얼굴로 말을 했다. 메두사도 어느새 심각한 얼굴이 되어 백모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백모래는 그 둘의 걱정과는 상반되는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백모래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오르카에게 되물었다.
"송하가 갈 곳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그... 스푼에 가기라도 하면... 지금 제가 나갔다올까요. 지금 상태로는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백모래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됐어. 잠시 다녀오라고 해. 나한테 화가 날 만도 하지."
다시 한 번 송하를 내버려두라고 말하며 백모래가 발치를 서성이고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어차피 걔가 돌아올 곳은 여기 밖에 없어."
다음편 예고:
"사사. 제가 스푼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자신을 붙들고 있던 팔의 힘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눈이 안 보여도 칼은 쓸 수 있습니다. 예전처럼 같이 싸울 수..."
어둠 속을 걷다 17
한참을 그렇게 어둠 속을 달렸다.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어떻게든 나이프 아지트와 멀어지고 싶어 숨이 차오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문득 공원의 흙 냄새를 맡은 송하가 멈춰섰다. 몸이 본능적으로 공원을 찾은 것 같았다.
송하? 혹시나 싶어 밤에 공원을 찾아보기로 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다가가 팔을 잡으니 경계하며 몸을 뒤로 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달려오는 와중에 긁힌 것인지 자잘한 상처들이 온 몸에 가득했다. 네가 공원을 찾지 않을 동안 네게는 감당하지 못할 어떤 일이 있었던가 보다. 그건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나야."
진정해, 송하. 나야.
"사사."
"응. 나야."
문득 서러워졌다. 왜 스푼을 떠났을까. 어째서 사사를 배신했을까. 사사에게 붙잡힌 그대로 송하가 물었다.
"사사. 제가 스푼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자신을 붙들고 있던 팔의 힘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눈이 안 보여도 칼은 쓸 수 있습니다. 예전처럼 같이 싸울 수..."
끝맺지 못한 말이 귓가에 처량하게 울렸다.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미 배신자라는 딱지가 붙어버린 이상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왜 돌아왔냐는 예전 상사의 날카로운 말도, 어릴 적 자신이 놀아주었던 아이의 차가운 시선도 자신은 견뎌낼 수 있었다. 모든 스푼 사원들에게 욕을 듣는다 해도, 그들이 경멸 어린 눈길을 대놓고 내보인다 해도. 귀야 막으면 될 테고, 눈이 보이지 않으니 그것을 핑계로 그들의 눈길을 모른 척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사사와 함께 돌아가게 된다면 사사는 그동안 적과 내통했다는 뒷말을 들어야 할 것이었다. 사사에게 웃어보이며 호감을 내비치던 사원들, 사사의 팀원들은 사사에게 벽을 쌓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가장 친해야 할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자신을 피한다는 것에 대한 슬픔, 그것을 알면서도 말할 수 없는 괴로움. 그 모든 것들을 삼킨 채 제게는 부드러운 시선만을 보낼 사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싫었다. 그래서 돌아갈 수 없었다. 모든 질타를 받는 것이 오로지 자신 혼자 뿐이라면, 어쩌면 스푼으로 돌아가는 것을 꿈꿔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사의 일상까지 망치기는 싫었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자신 혼자로 충분했다.
"네가... 네가 가자고..."
네가 먼저 돌아가자고 했잖아. 먼저 가자고 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거야. 나하고 같이 가기 싫은 거야? 나는 너하고 예전처럼 지내고 싶은데. 나는 너만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은데. 너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뭐든 견뎌낼 수 있는데. 스푼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는 송하의 말을 들었을 때 환해졌던 마음이 순식간에 불이 꺼져버린 것처럼 가라 앉았다. 왜 그 말을 끝맺지 않는 거야.
"가자."
그러니까 같이 가자. 제발 같이 돌아가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지금 출발하면 돼.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내 기숙사에 같이 있다가 내일 아침 일찍 서장실로 가자. 틀림없이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사실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온전히 예전의 생활을 찾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자. 응?"
흐느끼며 쏟아내는 말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쏟아내는 사사의 목소리가 듣기에 슬펐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을수록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은 단 한 곳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을 붙든 채 흐느끼는 사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송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도 그럴 수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슬프게도,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스푼을 배신한 것은 자신이었고, 백모래의 성격을 알면서도 나이프에 들어간 것도 자신이었다. 백모래의 천진함으로 둘러싸인, 그러나 실상은 잔인하기 그지 없는 칼 끝이 저를 향했다고 해서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사사라면 자신의 불평을 말없이 들어주겠지만, 사람이 염치가 있다면 불평을 하는 것은 여기서 그만두어야 했다. 벌을 받나. 이 사람을, 속해 있던 곳을 배신했던 벌을 이제야 받는 건가.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백모래에게 화가 났던 것도 서서히 식었다. 이제 자신이 돌아갈 곳은 나이프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하며 송하가 그 말을 하자 사사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로?"
알면서도 일부러 묻는 짓이었다.
"나이프로 말입니다."
"나랑은?"
나랑 같이 안 가고? 잠시 조용히 있던 송하가 고개를 저었다.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준 사사가 송하에게는 보이지 않을 눈물겨운 미소를 지었다. 그 잠깐 동안의 망설임은 송하가 잠시나마 보여주었던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잠깐 동안만이라도 저와 같이 스푼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해 준 것이 고마웠다. 언젠가는 정말 송하와 스푼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자 오늘은 송하를 이대로 보내줄 마음이 생겼다. 나중에 또 봐. 아니, 내일 또 봐, 송하.
억지로 발걸음을 해가며 나이프 아지트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돌아가기 싫지만 자신이 돌아갈 곳은 여기 뿐이었다. 스푼에는 더이상 돌아갈 수가 없었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곳, 스푼. 오기 싫었지만 올 수 밖에 없는 곳, 나이프. 몇 시간 전 자신이 뛰쳐나왔던 곳, 그리고 다시 제 발로 찾아온 곳. 다시 돌아온 자신을 보고 그들은 어떻게 반응을 할까. 그렇게 기세 좋게 뛰쳐나갔더니 결국 기어들어 왔구나, 라는 비아냥이 돌아올까. 혹시나 스푼과 접촉하지 않았냐는 말을 듣지는 않을까. 그러나 긴장한 마음으로 문을 연 것치고는 허무하게도, 아무렇지도 않은 인사의 말이 들려왔다.
"왔어?"
"네. 왔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건네는 말에 송하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백모래가 소리 없이 웃으며 봐, 돌아왔잖아, 라는 의미가 담긴 시선을 오르카와 메두사에게 보냈다. 송하가 돌아올 곳은 이 곳 밖에 없어. 우리가 그렇듯이.
다음편 예고:
밤이면 스푼과 나이프가 뒤섞여 꿈에 나왔다. 아침이 되면 밖에 나가 사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사사는 오지 않았다. 오늘만 오지 못한 것이겠지, 싶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자신이 기다리는 이는 공원을 찾지 않았다. 이제는 사사마저 저를 버린 것일까.
어둠 속을 걷다 18
"야, 너희들 출장. 지금 당장 출발해라."
아침 일찍 다나가 비행팀 모두를 소환한 후 대뜸 출장을 요구했다. 며칠 걸릴 것 같으니 각오하고 가라는 다나의 말에 나가가 소심하게 항의했다.
"출장이요? 저 학교 가야 되는데..."
"결석계 써주면 되잖아."
단박에 출장 잘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외치는 나가의 말을 들으며 사사가 송하와의 약속을 생각했다. 송하는 어떡하지. 공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텐데. 오늘 꼭 보자고 했는데. 등 떠밀려 가게 된 출장길이 달갑지 않았다. 출장 간 김에 시간이 남으면 관광이라도 하자며 자신의 팀원들은 신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선배, 준비 다 하셨어요?"
"응."
나가와 혜나의 얼굴을 쳐다보며 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아가던 중 공원을 발견한 사사가 그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인지 송하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이곳으로 송하가 나오겠지. 오늘 보기로 한 약속을 못 지킬 것 같다. 내가 널 보러갈 수 없는 며칠 동안 잘 지내고 있길. 혹시라도 내가 널 일부러 보러 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길.
과연 자신은 백모래에게 부하로 생각 되기는 했을까. 스푼에서 나이프로 옮겨온 재밌는 배신자로만 생각 된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단순한 흥밋거리였을지도. 과연 나는 이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칠 수 있을까. 그 어느 생각도 확신할 수 없어 괴로웠다. 어느 누구에게도 던지지 못할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고 있자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스푼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사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그때 미친 척하고 같이 스푼으로 돌아갈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자고 고고한 척을 했나. 한 번 배신한 거, 두 번은 못할까 싶었다. 철면피라고 욕을 들어도 좋으니 정말로 스푼으로 발걸음을 할까. 다시 한 번 나를 받아달라고 빌기라도 해볼까. 이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심심풀이 대상이 되어도 좋으니, 또 한 번 그렇게 이용 당하고 버려져도 좋으니 사사 곁으로 갈 수 있었으면.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몸과 마음의 괴리감으로 인해 현실과 망상을 구분 지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헛된 꿈만 꾸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 스푼 기숙사일까, 아니면 나이프 아지트일까. 뒤를 돌아보면 자신의 옛 팀원들과 사사가 보일 것 같았다. 정말로 누군가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임무를 나가기 위해 급하게 뛰느라 스푼 복도에 울리던 발자국 소리, 제압 당한 범인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범인의 목소리는 백모래의 목소리로 바뀌기도 했고, 팀원들의 얼굴은 오르카와 메두사로 바뀌어 자신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밤이면 스푼과 나이프가 뒤섞여 꿈에 나왔다. 아침이 되면 밖에 나가 사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사사는 오지 않았다. 오늘만 오지 못한 것이겠지, 싶었다. 임무가 많아서 못 올 수도 있었다. 내일이면 어제 못 와서 미안하다며 자신에게 말을 건네줄지도. 오늘 와주었으니 괜찮다는 대답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자신이 기다리는 이는 공원을 찾지 않았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할 수 있는 한 오래 공원에 머물러도 사사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는 사사마저 저를 버린 것일까.
허탈한 웃음이 지어졌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둠 속을 걷다 19 (完)
더이상 공원을 찾지 않기로 결심했다. 영영 채워지지 않을 옆자리를 생각하니 허망하기만 했다. 사실은 이게 맞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동안 얼굴을 봐준 것만 해도 고맙다고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던 자신을 도와준 것만 해도 고맙고, 같이 스푼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해준 것만 해도 고마웠다. 하지만 어째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던 버팀목마저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동료도, 시력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사사와 공원에서 만나던 시간은 유일하게 제 손에 남은 것이었다고. 하지만 그 시간도 이제는 끝이 났다. 이제 제게 남은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사사조차 자신을 버린 지금,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며칠 동안 최선의 선택을 찾아내기 위해 고민하던 송하의 얼굴에 문득 희미한 웃음이 비쳤다.
몸에서 칼집을 풀어낸 송하가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눈이 멀어버린 이후로 단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던 칼을 망설임 없이 꺼내 들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혹은 누군가를 베기 위해 썼던 칼을 이 용도로 쓰게 될 줄은 과거의 자신은 꿈에도 몰랐을 터였다.
사실은 스푼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사 곁으로 다시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사사는 절 봐주지 않을 테지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배신자라 욕하지 않고, 이토록 추해져버린 절 예전처럼 대해주어서 한없이 고마웠습니다. 머릿속에서 끝내 지워지지 않는 사사의 모습을 애써 지워내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또렷해지고 있었다. 사사를 생각하자 칼을 붙잡은 손길이 떨리던 것이 멈췄다. 아까보다는 한결 수월하게 칼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사사는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사사, 가는 길 내내 혼자 어둠 속을 걸어야 할 테지만 사사와 만났던 기억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근데 송하는 왜 안 와?"
"글쎄요?"
"내가 가볼게."
"제가 가도 괜찮은데요."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앉은 식탁에는 오로지 한 사람의 자리만이 비어 있었다. 송하는 왜 안 오느냐는 백모래의 질문에 메두사가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의자에 앉아 발을 흔들던 백모래가 일어섰다. 자신을 따라 일어선 오르카를 만류하며 백모래가 날쌘 걸음으로 송하의 방을 찾았다.
"송하. ...어, 죽었다."
처음 다녀와보는 출장에 나가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관광은 고사하고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장했다. 임무 보고가 끝나자마자 어서 집에 가서 쉬라며 나가와 혜나의 어깨를 토닥여준 사사가 서장실을 나와 스푼 복도를 달렸다. 점심 시간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 공원을 가면 간신히 송하와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얼굴을 보게 될 송하에게 해줄 말이 많았다. 갑자기 출장을 가게 되어서 공원을 찾을 수 없었어. 미안해. 나 기다리고 있었지? 그동안 혼자 공원에서 뭘 하고 있었어? 못 본 사이에 잘 지내고 있었어? 송하에게 할 말을 정리하며 사사가 달리던 속도를 높였다.
"오늘도 혼자 어디로 가시는 거에요?"
"응."
"겨울에도 점심 시간만 되면 어디로 가시더니, 지금도 여전하시네요."
이제는 점심을 먹을 때가 되면 나가와 혜나는 오늘도 일이 있냐며 알아서 자신을 보내주고 있었다. 공원을 찾은 사사가 송하와 앉던 벤치를 찾았다. 칼바람이 불던 계절은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봄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얇은 와이셔츠와 조끼만을 입고 다니던 송하를 생각하면 잘된 일이었다. 이제는 그 차림새로 다녀도 송하는 춥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도 오지 않는 걸까. 송하는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송하, 네 모습이 보이지 않은지 오래됐다. 네가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언제든 돌아올 너를 맞이하기 위해 나는 여전히 이곳에서 널 기다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이곳까지 올 기운이 없어서 오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벌써 봄이 오고 있다. 봄이 오면 네가 다시 이곳으로 와줄까. 널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네 모습을 보여줄까. 봄이 왔을 때 네가 오지 않아도 괜찮다. 여름에도, 가을에도, 또 겨울에도, 눈이 보이지 않는 네가 다시 길을 찾아 나에게로 올 때까지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면 될 테니.
꽃이 진 후에 우리는 다시 시작 (어둠 속을 걷다 에필로그)
나이프 일당들을 잡아들였다. 모든 일의 원흉이었던 백모래를 시작으로 모든 이들을 잡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너는 없었다. 너는 싸움판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너만 다른 곳으로 빼돌린 것일까. 그렇게까지 할 만큼 이 남자는 치밀한 사람이었던가. 말없이 그에게 시선을 주는 순간 반쯤 풀린 붕대 사이로 그가 눈을 마주쳐왔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누구 찾아? 네 친구? 송하 찾는 거 맞지?"
이 질문에 긍정을 한다면 그는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어줄 생각이 있을까.
"죽었어."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멍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겨우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웃는 얼굴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니 이런 거짓말쯤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터.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은 확실히 못된 짓이다. 그러나 그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짜야."
언제, 어떻게? 휴대폰을 보여주자 그가 대답을 했다. 그가 말한 시기는 네가 더이상 공원으로 오지 않은 때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내가 죽인 건 아니야. 아침 먹으러 안 오는 걸 부르려고 갔더니 죽어 있더라고. 무덤은 못 만들어줬어. 대신에 명복은 빌어줬으니 그걸로 봐줘."
너는 내게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지 못한 거였다. 너는 이 자에게로 가서 대체 무엇을 얻었나. 그는 죽어버린 널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지도 않았다. 너는 정말 그곳에서 온전히 너를 위해 무언가를 얻은 것이 있기는 했나. 마지막으로 보았던 네 얼굴이 떠올랐다. 네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사사. 제가 스푼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저도 그럴 수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좀처럼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던 네가 겨우 보여준 진심이었다. 그때 널 잡았어야 했는데. 억지로 끌고가면 아슬아슬한 걸음으로 결국에는 네가 날 따라왔을지도. 너는 어째서 생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그렇게나 삶이 힘들었던 것일까. 널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의 얼만큼은 이 자의 책임이 있겠지. 코트 주머니에 있는 총을 찾자 그것을 눈치챈 그가 피식 웃었다.
"아무리 내가 사형이 확정된 사람이라지만 네가 날 죽이면 안 될 텐데."
그의 말이 맞았다. 그를 죽이는 것은 법의 몫이지 내가 할 일은 아니었다. 힘없이 돌아서는 내 뒤로 그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안됐네, 네 친구가 죽어서."
친구. 네가 나의 친구였을까. 너는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너만 있으면 뭐든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은 진심이었다. 나는 네 곁에 있고 싶었다. 그게 어떤 형태로라도 좋았다. 그러나 너는 나에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너는 혼자서 저승길을 걸어가버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휘청이며 걸어갔을까. 죽을 때도 혼자였고, 가는 길도 혼자였다. 너는 끝내 어둠 속을 헤맸던 건가. 또 한번의 계절이 바뀌고, 여러 번 봄이 찾아와도 너는 내게 오지 않겠지. 네가 다시 길을 찾아 나에게로 올 일은 한평생 일어나지 않을 테지. 그렇다면 꽃이 진 후에 우리는 다시 시작하면 된다. 내 목숨이 다한 후 네가 있을 곳으로 걸어가면 될 일이다. 그렇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