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에 꽃내음처럼 4
본편 3 / 과거 1-2 : 보름달이 뜨는 날, 그대 날 보러 와요
그는 여전했다. 웃는 얼굴, 다정한 낯빛. 무언가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사는 여전히 다정했고 말 한 마디 없이 떠났던 것에 대해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돌아와주어서 고맙다는 얼굴, 조심스레 다가오는 손길에 고맙기에 앞서 그의 진짜 감정을 알 수 없어 두려워졌다. 조금의 두려움조차도 엄청난 어둠처럼 자신을 감싼다. 어쩌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조그만 생각에도 그녀를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사사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상냥함과 예전의 그 감정을 되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주고 싶었지만 받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확신이 들지 않는 상대에게 부담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의 태도라고 여겼다. 하지만 뜯어고칠 생각은 없어 그대로 놔둔다. 한 번 입을 열면 그녀는 그에게 사랑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를 흔들고 싶지 않았다. 감정에 흔들려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 혼자면 된다.
그러니…… 비록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이 말을 외우는 것은 그녀에게 주문이 되었다. 비록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괜찮다는, 꿋꿋함을 가장한 슬픔. 감정이 회오리치고 자신을 짓눌렀다.
“송하 씨는 마음이 많이 아픈 상태입니다. 이 명칭은 많이 들어보셨을 거에요. 우울증, 송하 씨는 우울증입니다.”
엄숙하게 내리는 선고에 그녀는 칼에라도 찔린 듯 있을 리 없는 통증을 느꼈다.
“사실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흔한 병입니다. 괜찮아요, 송하 씨가 이상해서 걸린 병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음이 아플 수 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송하 씨만 괜찮으시다면 상담 치료를 진행하는 것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오셔서 한 시간 반 정도 송하 씨와 제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어때요, 어렵지 않죠?”
“저, 저는…… 글쎄요.”
아까까지만 해도 무심해 보이던 눈길이 어느새 환자를 보는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사람 앞에서 자신은 환자로 취급된다는 것을 깨닫자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애인 분도 송하 씨가 아프지 않길 바랄 거에요.”
사사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사를 생각했다. 큰 날개를 움츠린 채 곁에 앉은 사람과 닿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와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머릿속에 퍼진다. 아프지 않으면, 그래서 사사에게 기대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면 차근차근 다가가봐도 괜찮지 않을까.
“……노력해보겠습니다.”
그가 활짝 웃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상담에 응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올 때마다 불안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까만 눈동자로 저를 쳐다보며 괜찮아, 송하, 하고 웃는 얼굴. 곁에서 얌전히 있는 하얀 손을 잡고 싶어 손을 뻗다가 슬그머니 숨겼다. 송하 씨, 들어오세요, 하고 이름이 불리자 그녀는 내키지 않았지만 일어섰다. 상담은 그 어떤 임무보다 힘들었다. 항상 감정과 생각을 숨기며 임무를 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다 말하라는 요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사가 송하를 보며 눈을 마주쳤다. 다녀와, 하고 손을 흔드는 모습. 송하는 그런 사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불안하지만 상담사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얼마든지 편히 앉으시라고 상담사가 권했지만 뻣뻣한 자세를 유지한 채 이것이 편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정말 그녀는 그런 자세가 편했다. 쉽게 풀어져 흐물거리는 자세는 불편할 뿐더러 몸에 도움도 되지 않는다. 흐트러진 것은 모두 나쁘다.
“마음은 누구나 아플 수 있어요. 다만 아픈 것의 이유를 찾으려면 원인을 살펴봐야 되겠죠? 송하 씨의 기억을 되짚어볼 겁니다. 일 년 전에 무엇을 하셨는지 함께 생각해볼까요?”
“일 년 전…….”
기억이 새하얀 도화지 위에 새겨진 그림이라면 먹물이 그 위를 뒤덮은 듯한 기분이었다. 먹물을 잔뜩 묻힌 채 어리둥절해있는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무슨 일이 발단이 되어서 모든 의욕을 잃고 주저앉아 있다고 추측해보지만 추측조차도 힘들 정도로 기운이 빠져 있다. 사실은 이대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지만 역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마지막 남은 기운을 힘겹게 끌어올려볼 뿐이다.
“송하도 메두사나 오르카처럼 고양이는 별로야?”
“집에 있으니까 책임져야 할 생명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가늘게 뜬 노란 눈, 햇살에 반짝이는 흰 머리카락, 그 자체가 고양이일 것이다.
“기억하시는데 어려움은 없으신 걸 보니, 이때가 송하 씨에게 그렇게 나빴던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다른 날을 살펴볼게요.”
상담사가 기억해내길 요구하는 시간은 점점 현재로 가까워진다. 그녀 자신 속의 건강하고 흔들림 없던 모습은 천천히 흐트러져 지금의 모습과 비슷해지고 있었다. 점점 감정에 휘둘리고 불안해하는, 상담사가 보고 있는 환자의 모습. 기억도 드문드문, 구멍이 뚫리는 부분이 많아지고 상담사의 질문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라는 대답을 반복할 무렵 그녀의 기억은 꽉 막히고 마는 부분에 도달한다. 이때다, 싶어 상담사가 몸을 내민다.
그날은 날이 유독 따뜻했던 가을이었다. 유독 새파란 하늘 아래 아무 겁 없이 길을 걷고 있었고, 걸었는데, 걷다가, 걷고 나서…….
“……그때 당신은 누군가를 만났나요?”
움찔, 치솟는 송하의 어깨를 보며 상담사는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초록색 파도 같다고 여겼다. 그녀는 입을 꽉 다물었다. 꽉 다문 입과 함께 급하게 흔들리는 고개. 상담사가 그 뜻을 알아차릴 때쯤에 그녀는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난다. 드르륵, 하고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저, 저는…… 그만두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이건 그만두겠습니다.”
“네? 송하 씨, 잠깐……. 나가시면 안 돼요!”
잡기도 전에 그녀는 방문을 찾아 나가버렸다. 한 사람이 나간 방이 고요해졌다. 그 고요함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상담사가 그녀를 쫓아 방을 나왔다. 그녀는 상담을 진행하기 싫다고 소리를 지르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를 항상 함께 다니는 남자가 진정시켜주었다. 다소 말이 없었지만 그는 침착하게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아예 병원을 나서는 그녀를 급하게 따라나간다. 그는 마치 그녀의 안정제 같다고 생각하며 상담사가 갑작스럽게 비어버린 상담 시간을 홀로 보냈다. 어쩌면 그는 그녀를 안정을 취하게 만들고 당당한 모습으로 변하게 할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약을 받았다. 이것은 수면제고, 이것이 항우울제라며 짚어준 알약들은 색이 전부 흰색에 가까워서 뭐가 뭔지 구분을 하려고 해도 힘들다. 어차피 요즘에는 무엇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약의 색들을 익히는 것도 어차피 할 수 없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집에 돌아와 약들을 쳐다보다 오늘 먹어야 할 부분을 뜯었다. 다시 쳐다보며 분간을 해보려는 시도를 했지만 역시나 결과는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