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사사xGS송하] 바람결에 꽃내음처럼 2 (1부 완결, 2부 초반)
이런 영웅은 싫어 사사GS송하 - 바람결에 꽃내음처럼
바람결에 꽃내음처럼
1부: 네가 오니 눈물이 그쳤지
스푼에서 옷을 간소하나마 깨끗한 걸로 주겠다는 것을 송하는 퇴직금만으로도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스푼에 붙잡혀올 때부터 입고 있었던 랩 스커트 형식의 옷이 반쯤 찢긴 채 종아리 근처에서 찰랑거렸다. 사사는 그제서야 송하가 신고 있는 구두가 다소 높은, 금방이라도 굽이 나갈 것 같은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송하, 하고 부르자 송하가 그를 쳐다보았다. 원체 180정도의 키에 높은 구두까지 신어 눈높이가 맞을까 말까 한 상태였다. 한층 가까워진 눈동자에 홀린 듯이 쳐다보며 잠깐 밥도 먹고, 음, 신발도 사고 그러는 건 어때? 하고 묻자 송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조금이나마 편한 신발을 신게 해주고 싶었다. 맛있는 밥도 먹여주고 싶었고, 보다 활동하기에 용이한 옷도 하나쯤 사주고, 사사에게는 많은 할 일이 있었다.
신발과 옷을 산 것까지는 좋았는데, 식당에 들어서자 어쩐 일인지 송하는 입맛이 뚝 떨어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밥이 나오기 전에도 영 식욕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더니 밥이 나와서도 똑같은 상태였다. 갓 나온 음식은 틀림없이 먹음직스러운데도.
“어디 아파?”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지? 걱정스런 물음에 송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사는 상냥했지만, 그 상냥함에 취해 모든 것을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가 아픈 것이냐는 질문 하나에도 저렇게 걱정이 담긴 얼굴인데. 고개 숙여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입에 들어간 음식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혓바닥이 매끄럽지 못하고 까칠한 느낌이 드는 것이 혓바늘이라도 돋았나 싶기만 하다. 음식을 몇 숟가락 떠보지도 못하고 테이블에 소리 없이 숟가락을 놓아버렸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먹어보는 바깥음식이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지금 입맛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일이 지나도 상태는 똑같았다. 밥을 먹었느냐고 물어보면 입맛이 없어 물 한 잔으로 대신했습니다, 라는 대답이 여러 번 들려오자 사사 입장에서는 여간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송하도 그것을 알았기에 어떻게든 뭔가를 먹어보려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생활이 급격하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물 한잔이 선식 한 잔으로, 혹은 과일 몇 조각쯤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더군다나 아무도 없이 혼자서 사는 송하를 끼니를 챙겨주겠다고 매일 붙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는 사사는 제 밥벌이가 끊길 것이다.
뜨거웠던 햇빛이 점차 약해져 가는 어느 가을날이 되어서도 송하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네? 아, 아니, 괜찮습니다. 안 와도 됩니다. ……정 그렇다면 오십시오. 아니요, 싫은 게 아니라…… 오면 저야 좋습니다만…….”
진심을 혀끝에 머금고 밖으로 나오게 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특히나 송하에게는 그랬다. 배신자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스파이였다, 라는 커다란 비밀을 끌어안고 몇 년을 살아왔던 그녀는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와 송하의 차이점을 들어보라고 한다면 아이는 어떻게든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송하는 최소한의 감정을 보여주려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사사에게 그런 자신의 기분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송하가 거실 쇼파에 앉은 그대로 졸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잠도 예전에 비해 많아졌고, 걸핏하면 나른해지는 탓에 제대로 바깥 활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좀처럼 밖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졸린 것뿐만 아니라 간단한 산책조차도 귀찮아진 탓이기도 했다. 하도 졸아서 찾아온 사사를 문 밖에 세워두는 일이 많아졌다. 송하는 아예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졸음 사이사이에 보이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떠도, 감아도 색채는 찬란하다. 조각조각 떨어지는 색들이 몽롱하기만 했다. 그 색들을 파고드는 불안감에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이제 할 일조차 없는, 그저 시간을 헛되이 쓰는 사람이 되어 평생을 살아가야 하나? 아무에게도 쓸모 없는 누군가가 되어? 사사에게 기대고 있는 현실은 어떤가. 제 나름대로 눈치를 본답시고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그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지만 그때마다 큰 도움을 주고 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더 가증스러운 건, 그것을 아무 말 없이 받고 있는 자신이었다. 생각하지 않고 싶다. 무언가에 신경을 쓰자니 머리만 아프고. 아무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아, 세상에. 가증스럽고 뻔뻔한 년.
아무 생각도 안 하겠다고? 아, 잠깐. 앞에 보이는 건 뭐지, 무엇일까. 온통 새까맣고, 까만 것이 마치 날 잡으러 오는 듯 한데. 이제 저 어둠은 온 색채를 잡아먹겠지. 아, 벌 받는 거야. 그래, 아무 생각도 안 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생각해서 벌을 받는 거야. 어디다 빌어야 합니까, 이 불안감을 없애려면. 영정 님? 아니면 사사? 누구든 간에 제발 좀 저를 살려주십시오. 남한테 기대겠다느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는 하지도 않고 힘들다고 누구한테도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나 하나 봐달라는 말, 입도 벙긋 안 할 터이니, 제발…….
“송하!”
눈이 번쩍 뜨였다. 햇살은 여전히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사사가 자신의 손을 잡은 채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무언가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사사를 그 ‘무언가’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집에 들어와보니까 잘 자고 있는 것 같아서 방해 안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표정도 안 좋아지고 울먹거리길래…… 그 말을 들으며 송하가 잡혀 있던 손을 빼냈다. 사사는 여전히 걱정이 드리운 얼굴이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마 위로 다가왔다. 큰 손이 한 번에 이마를 덮었다.
“열 나.”
“열은요, 무슨. 앉아 있던 자리가 햇빛 받는 쪽이어서 그럴 겁니다. 햇빛이 얼굴에 닿아서 그렇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사사의 손을 치웠다. 설령 자신이 정말로 아프다고 해도 아프다는 것을 빌미로 신세 질 생각은 없었다. 그때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자신을 잡으러 오는 존재가 비록 현실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하더니 사사가 일어나 부엌에 놓여 있던 것을 갖고 오기 시작했다. 키가 큰 그는 걸음걸이는 똑발라도 가끔 보면 휘청이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모양새만 놓고 보면 마치 홍학과도 같이 다리만 기다란 것이, 영락 없는 새였다. 새의 종만을 따지고 보자면 그는 까마귀지만. 자, 봐봐. 아까 이거 사왔어. 어느새 돌아온 사사가 큼직한 흰 봉지를 눈앞에 보여주었다. 봉지 안에서 흘러나오는 냄새가 얼마간은 익숙하다.
“고구마?”
이런 것을 제가 사다 두었던가. 하기야 요즘은 어떤 행동을 해도 머릿속에 남는 것이 별로 없기는 했다. 다소 멍하게 묻는 그녀를 보며 사사가 웃었다. 아까 이거 사왔어. 좀 식기는 했지만 맛있을 거야. 껍질 까는 연습을 많이 해봤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 속살이 보였다. 제가 먹을 것은 아니었는지 어느새 송하의 손에 고구마가 들려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먹으려고는 했으나 입에 대는 시늉만 몇 번, 입에 들어가는 양은 한 숟가락 정도도 되지 않았다. 왜 더 먹지 않느냐는 눈빛에 송하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먹으면 소화가 되지를 않아서요. 몸이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먹기 싫다는 사람한테 계속 음식을 권하는 건 좀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사사는 먹을 것을 더 권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있다가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 듯 웃었다.
“오늘 있지.”
다소 서투른 발음으로 사사가 짐짓 밝은 얼굴로 외쳤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무엇을 너와 함께하며 금요일 저녁을 보낼까 하다가 영화관에 가서 영화도 보고, 팝콘을 먹으면 어떨까 했다고. 그 다음에는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서 놀자. 물론 네가 원한다면 그냥 집에서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영화를 보며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는 것도 좋을 거라고 제안했다. 조심스런 제안에 송하는 어떻게든 사사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주기 위해 노력했다.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미소를 짓는 등, 그녀로서는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제안은 고맙지만 일을 하고 바로 우리 집에 왔을 텐데 밖에 나가는 것은 사사에게 무리일 것 같다,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며 송하가 그렇게 말을 하니 사사는 거절할 것도 없었다.
“와, 한다!”
“그러게요.”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영화는 의외로 비교적 최근에 개봉한 것으로, 화면에 가득 찬 화려한 색감이 관객들을 사로잡을 만 했다. 샛노란 노란 색에 강렬한 붉은 색. 그것들을 보며 사사는 몇 번이고 감탄했다. 화려한 걸 좋아하는 까마귀의 습성으로 보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어쩌면 날개를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송하가 보기에는 무채색으로 가득한 사사도 충분히 빛나 보였다. 하얀 이마에 유달리 검은 머리카락이 땀으로 인해 달라붙었다. 코트가 덥다, 덥다 하더니 기어이 벗은 코트가 쇼파 팔걸이에 걸쳐져 있다. 그의 날개는 그의 코트 색보다도, 칠흑보다도 더 검다. 눈동자는, 더욱 까맣고. 아, 까만 건 사사 빼고 전부 무섭다. 언제 어디에서 그녀를 향하는 칼날이 있을지 몰랐다. 어둠 속에서는 검사로서의 실력도 그녀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그날을 생각하자 송하는 몸을 떨었다. 다행히 사사는 알아채지 못한 듯 싶었다. 그저 이따금씩 저를 보며 웃는 사사의 얼굴에 마주 웃어주었다.
“그럼 주무십시오.”
“응.”
텔레비전을 끄자 사람이 두 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실은 한없이 조용했다. 영화 후반부쯤에는 고개가 꺾어질 정도로 졸고 있던 사사를 송하가 어깨를 흔들어 깨워 편히 자라며 쇼파에 베개와 이불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막상 송하와 잘 자라며 인사를 하고, 방으로 송하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자 잠이 달아나버렸다. 엎드린 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저와 송하는 사귀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애매한 관계였다. 아마도 사귀는 쪽에 가까운 관계라고 본다. 그렇지 않고서야 관계를 진전시킬 생각이 없다면 손가락 하나조차 용납하지 않을 그녀가 손을 잡으면 더욱 힘을 주어 마주잡아올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친구일 뿐이라 해도 남자인 자신을 집에 재워줄 리도 없고. 닫혀진 문틈 사이로 미약하게 불빛이 보인다. 아직 송하는 자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요즘 많이 달라졌다. 일찍 일어나 수련을 하던 몸이었는데 이제 그녀는 동이 틀 때쯤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잠을 자면서 햇빛을 맞는 것을 선호한다. 한 사람의 기호가 평생 가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바뀔 수 있겠다고 사사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한 달이 가까이 지나는 동안 오늘은 뭐 했어? 라는 질문에 그냥 있었습니다, 라는 대답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좀 문제인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가끔씩 전화를 받지도 않고 하루나 이틀 동안 연락 두절인 날이 있다는 것이었다. 출장이 걸려 송하를 직접 만나러 가지는 못하고 전화를 걸었더니 처음에는 받지 않았다. 그래, 처음 한 번은 일이 있어 받지 못했나 보다, 혹은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다 하고 이해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또 한 번 걸었던 전화도, 30분도 참지 못하고 다시 건 전화도 그녀는 응답하지 않았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고 가슴을 졸였다. 일을 때려치우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어린 팀원들 때문이었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신경을 써야 해 그도 바빴다. 출장이 끝나자마자 송하의 집으로 달려가니 왔습니까, 하고 맞아주었다. 사사는 속이 탔고 그녀는 퍽 태평했다. 전화가 온 줄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서 하지 않았습니다, 하더니 변명은 거기서 끝났다. 뒤돌아서는 몸을 돌려세워 단정한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많이 걱정했으니까 다음부터는 문자 메세지라도 한 통 남겨달라 부탁했다. 그녀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이 지켜진 적은 거의 없다.
그녀는 자주 아프다. 어느 날은 볼이 미어지도록 여러 가지를 먹다가도 어느 날은 물조차 입에 대지 않는다. 그 때문에 체중은 들쑥날쑥, 제멋대로 체중계를 왔다 갔다 했다. 언제인가부터는 먹어도 흡수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 이른 것인지 살이 찌지를 않았다. 바짝 마른 팔목이 안쓰럽고 볼이 패인 얼굴이 마음이 아팠다. 자주 감기에 걸리고 앓는 일이 잦아져 눈이 퀭하고 몸은 항상 미열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사는 죽 집을 하도 자주 찾아가자 그 집 아내가 몸이 많이 아프냐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내과에도 데려가 보았지만 그저 피로가 쌓여서 그런 것뿐이라며 자주 쉬게 해주라는 말만을 해줄 뿐이다. 그러니 이 이상 어떻게 쉬게 해주어야 하는지 사사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시들어갔다. 병원을 나온 후 시무룩해진 사사를 송하가 끌어안았다. 역시나 팔이 뜨끈했다. 그녀는 몸 속에 불이라도 간직하고 있는지 나날이 몸이 뜨거워진다.
그녀는 예전과는 달리 확실히 뭔가 이상했지만 뭐라고 꼬집어 말할 거리가 없어 사사는 말하려다 침만 삼킨다.
오늘도 같이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그녀의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어느 정도 늦어진 시간에 밤 인사를 하고 각자 자리를 찾아 든다. 사사는 습관처럼 자기 전에 이곳 저곳을 보았고 송하의 방 쪽에 여전히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본다. 30분, 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불이라도 꺼줄까 하다가 이건 너무 안 해도 될 행동을 하는 것 같다 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도 너무 불이 안 꺼지는 것 같아 결국은 사사가 부스스 일어섰다. 환한 불 아래에서 자면 아무리 많이 잔다고 해도 몸의 피로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혹시 그녀가 깰까 봐 걱정되어 살며시 문을 열었다. 당연하지만 불만 끄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침대 끝에 웅크려 앉은 모습이 보여 사사는 깜짝 놀란다. 그녀는 제가 들어온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송하?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톡 붙잡자 그녀는 겁먹은 얼굴을 하며 돌아보았다.
“나야.”
“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려고 하는 얼굴에는 선연한 공포가 드러나 있었다. 놀라 크게 뜬 눈과 바르르 떨리는 입술이 평온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사를 알아본 그녀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려 하지만 공포로 인해 벌려진 입은 좀처럼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몇 번이고 올라가려던 입 꼬리가 아래로 처진다. 종국에 가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찡그린 얼굴로 눈물을 터뜨리는 송하를 끌어안았다. 요 며칠 그녀는 이상했다. 별 것 아닌 것에도 경계하고, 예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울려고 한 게, 그게 아니라…… 저도 지금 왜 이러는지…….”
“응.”
“뭔가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말할 수는 없는데, 하여튼 제 자신이 제가 아닌 것 같고…….”
피곤해서 그런 거야. 송하는 아주 오랫동안 다른 곳에 가 있었잖아? 이제야 돌아와서 그 동안 힘들었던 게 터져 나와서 그럴 거야. 송하는 이상해지지도 않았고, 어딜 봐도 송하라는 걸 알겠어. 갈색 손에 꼭 쥐어진 사사의 셔츠 자락에 눈물자국이 번졌다. 동심원을 그리며 퍼진 눈물자국이 하염없이 슬펐다. 그제서야 사사는 송하에게 깃든 것은 몸이 아닌 마음의 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다음날, 송하에게 병원을 가자고 하니 그녀는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좀 기분이 나아진 것 같습니다, 어제는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랬나 봅니다, 등등 영 미덥잖은 소리를 하며 태도를 싹 바꾸는 송하를 이끌고 병원을 찾았다.
자, 지금부터 SCT 검사를 실시할 건데요, 이 종이를 보시면 몇 가지 문항들이 쓰여 있는데 빈칸을 채워 문장을 완성해주시면 됩니다.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오래 끄시는 건 삼가 해주시고요, 깊이 생각하실 필요 없이 그때그때 떠오르는 걸 쓰시면 됩니다. 너무 두루뭉술하게 쓰기보다 자세하게 쓰면 더 좋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며 상담사가 연필과 종이를 건네준다. 송하는 곰곰이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1. 나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을 때 .
2.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
3. 내가 어렸을 때는 .
4.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잊고 싶은 것은 .
5.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나만의 두려움은 .
송하가 검사를 하러 들어간 동안 사사는 불안한 기색을 잔뜩 보이며 대기실 쇼파에 앉아 있었다. 과연 검사를 제대로 마치고 나오려나 걱정이 되었다.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시계는 아직도 10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꼬박 하루를 지난 것 같은 시간이 흘렀을 무렵 드디어 송하가 대기실에 모습을 보였다. 사사가 반색하며 그녀에게 다가간다. 검사 비용을 계산하는 사사를 쳐다보며 안내원이 빙긋, 지극히 서비스에 가까운 미소를 보였다.
“다음주에 오시면 결과를 알려드릴 거에요.”
“네.”
다음주에 하루 정도는 일을 몰아서 하고 송하와 같이 병원을 오면 되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는 사사에게 송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다, 사사는 날 독립적인 성인이 아닌 어린 아이로 보는 것이 아니냐며 거부 반응을 드러내는 송하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런 건 아니야, 하고 사사가 급히 변명을 시작한다. 널 혼자 보내는 것이 걱정이 되는 것보다는 내가 따라오지 않으면 불안해서, 결국에는 그것이 전부 내게 위안이 되는 일이라 그렇다며 송하를 달랬다. 가까스로 달래놓은 그녀는 여전히 입술이 살짝 나와 있다.
겨우 송하를 달래 같이 병원에 가서 결과를 보는 것으로 새끼 손가락을 몇 번이나 걸었지만 그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일을 해도, 해도 산더미인 까닭이었다. 약속을 깨서 미안하지만 병원에 같이 가지 못하겠다고 전화를 걸자 그녀는 그 소식을 반가워했다. 전화기 너머의 사사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리고 아마도 그 생각은 맞을 것이다. 조금 섭섭했지만 송하는 아픈 것을 자신에게 더는 보여주기 싫은 것일지도 모른다며 홀로 마음을 토닥였다. 섭섭한 마음이 풀린 것은 그녀가 그녀에게 상담이 필요한 것 같다는 말에 수긍을 했고, 상담 시간을 잡았는데 같이 가려느냐고 물어왔을 때였다. 시간은 매주 화요일 오후 두 시. 사사는 화요일 오후에 해야 할 일을 월요일에 전부 몰아서 하는 것으로 다나와 약속을 했고 그날은 일찍 퇴근하게 되었다. 첫 번째 상담도, 두 번째 상담도 그녀는 같이 가게 해주었다. 그녀는 두 번째 상담 시간이 끝난 후 느닷없이 서점을 가자고 했다. 책을 읽고 싶어 그러는 것인지 물었더니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한 방법으로 일기를 쓰는 것을 제안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보여줄 필요는 없어요. 며칠에 한 번이어도 괜찮고 하루에 여러 번 써도 괜찮으니 쓰고 싶은 만큼 쓰면 됩니다. 너무 오랫동안 안 쓰지만 않으면 다른 것은 뭐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송하 씨가 다른 이들에게 하지 못하는 말,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말을 노트에 털어놓음으로써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사는 그녀를 위해 화사한 꽃무늬 노트를 골라주었다. 그녀는 군말 없이 그것을 샀다. 그녀는 사사가 저를 찾아오면 가끔 노트에 뭔가를 쓰다가 덮고는 했다. 나중에 맞아주어도 괜찮으니 쓰던 것을 마저 쓰라고 하면 그럼, 잠시만, 하고서 쓰던 것을 마쳤다. 그 노트는 언제나 텔레비전 옆에 위치한 탁자 위에 놓여 있었지만 사사는 결코 그것을 건드리는 일이 없었다. 그곳에 놔둬도 사사는 결코 보지 않을 것이라는 송하의 믿음을 깨고 싶지 않았다.
XX월 XX일
오늘은 노트를 샀다. 사사가 골라준 꽃무늬 노트이다. 화사한 것이 나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사사는 이것을 골라주며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다정한 사람.
다섯 번째, 혹은 여섯 번째의 상담 시간이었을까, 사사는 멍하니 대기실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그럴 수 있어요.”
“큰 충격으로 인해 그렇다고 봐야 할 겁니다…….”
작게 흘러나오는 소리들. 그는 가까스로 그런 말들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문득 문이 열리고 송하가 튀어나왔다. 모두들 당황한 기색이다. 사사가 서둘러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허락 없이 만지는 것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누구라도 달래야 진정이 될 듯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떠는 어깨를 쉴 새 없이 쓰다듬었다.
“……왜 그래, 응?”
“저…… 전 하기 싫습니다! 이제 이런 것, 질렸습니다!”
그녀가 외쳤다. 너무나 큰 소리로 외친 탓에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물론이요, 사사까지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사사는 송하에게 얼굴을 찌푸리지도, 싫은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래, 송하, 이해해. 넌 언제나 강한 사람이니까, 남에게 기대는 것이 낯설고 힘들겠지. 그래도 한 번 해보면 좀 낫지 않을까? 모르는 사람인 만큼 이것저것 편하게 말할 수 있을 거야. 자신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다면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몇 마디 말이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이 송하의 괴롭고 슬펐던 부분들을 그녀에게서 듣지 못해도 좋으니, 다른 이들에게서라도 송하가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냥……. 하기 싫습니다. 그냥 싫어요. 누구나 하나쯤 하기 싫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제게는 이런 곳에 오는 것이 그런 일입니다.”
“……그래?”
“네. 그러니 나가면 안 되겠습니까?”
무작정 싫다며 아이처럼 발까지 동동 구르는 송하는 그녀답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서 나가자며 그의 손을 끌어당기는 모습을 모른 척 하는 것도 어려웠다. 어차피 한 번 오고 말 곳도 아니니, 이번만은 그녀 마음대로 하게 해주자는 심정으로 그가 그녀의 손을 고쳐잡았다. 다음에 오겠습니다, 하는 듯이 사사가 접수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송하는 무섭도록 예의를 차리는 평소와 달리 고개를 숙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서둘러 걸음을 했다. 재빠른 걸음걸이의 그녀를 따라 허둥대다 하마터면 문에 머리를 부딪힐 뻔 했다.
“우리, 뭐 좀 마실까요?”
이상하리만치 진저리를 치는 그녀에게 말하기 싫을 만큼 힘든 일이 있었느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묘하게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병원은 나중에 가겠습니다. 나중에 꼭 갈 테니 걱정 마십시오. 아까는 기분이 좀 그랬습니다. 별 것 아닙니다.”
혹여나 병원에 억지로라도 데려갈까 걱정이 되었는지 주섬주섬 변명을 주워섬기는 모습은 자신이 익히 보아 온 송하의 모습과 상당히 달라서 심히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일단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짓는다. 지금까지 수없이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혼자 병원을 찾아가보았지만, 법적인 관계의 보호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담자의 상담 내용을 알려줄 수는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래도 몇 가지 주의사항이라도 알려달라고 하자 지나치게 내용을 빽빽하게 쓴 점, 어느 부분은 간단하게 썼지만 또 다른 부분은 이상할 정도로 강조해가며 쓴 점 등을 들어가며 차근차근 예를 들어주었다.
아무래도 자세하게 쓰면 쓸수록 좋죠. 내담자의 상태를 파악하기에 도움이 되니까요. 그런데 문장을 쓰는데 굳이 불필요한 수식어를 몇 개씩 넣어가면서 썼다는 것은 감정적인 부분에서 뭔가 후유증이 남아 있다고 봐야 할 거고요. 또 어떤 부분은 정말 단순하게 썼죠. 이 부분에서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담자 분의 속마음일 수도 있고요, 실제 겪었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송하는 마음의 어디가 많이 아픈 것일까.
XX월 XX일
오늘은 어제와 똑같고. 사사는 좀처럼 먼저 전화를 걸지 않는다. 여러 달 전에는 그토록 다정했는데. 그 애정을 달라고 하면 너무 이기적일까. 어쩌면 이제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다정하니 다정한 이를 만나겠지.
XX월 XX일
내가 봐도 내가 별로인데, 사사도 그럴 듯하다. 내가 짜증스러울 수도 있겠다. 눈가에 비친 짜증스러운 표정. 더는 내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야 하는데.
XX월 XX일
힘든
힘든 적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봐야 지나간 일일 뿐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송하에게 전화를 하지 못했다. 전화를 잠시라도 걸려고 하면 누군가가 저를 부르고는 하는 것이다. 여러 번 그것이 반복되자 사사는 지쳐 있었다. 마침내 전화를 걸 틈이 생겼을 때, 그녀는 받지 않았다. 오늘은 전화를 받기 싫은 날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저녁, 혹은 내일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가야 되겠다. 사사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혹시나 송하가 전화를 할 경우를 대비해 진동으로 해놓는다.
내 귀한 당신께.
흰 종이에 펜으로 서두를 적은 그녀가 한껏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지어보는 행복한 웃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이후로, 그녀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이 아니라 참말로, 그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원한다면 사사처럼 날개를 가질 수도 있을 터. 참으로 힘든 결정이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잘 견디어냈느냐, 스스로를 다독였다. 비로소 편안해진 마음이었다. 얼굴에 웃음이 만발했다.
그러니 이제…….
2부: 너는 비처럼 쏟아졌다
송하가 자살했다. 치맛자락이 길게 늘어지고 그 아래로 하얀 버선발을 내놓은 채 그렇게 갔다고 했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는 모른다. 되짚고, 또 되짚어봐도 이유를 찾기가 힘들었다. 하기야 내 앞에서 너는 언제나 그 표정 그대로였었지. 몽상은 비집고 들어가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던 그 변함없는 얼굴에 모든 것을 다 감내할 만큼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송하는 왜 죽었을까. 생각해보면 수상쩍은 부분도 있더랬지.
“응?”
“말하면 안 되는 겁니다.”
가끔씩 뭔가를 말하려던 입술은 답을 주지 않았다.
“왜?”
“비밀입니다.”
내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송하는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돌아간다. 그녀의 죽었을 당시의 충격은 어느 정도 옅어져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을 수 있게 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SSRI, NDRI, SNRI. 탁상 테이블 위에 놓인 약병들을 무심히 살펴보며 아무 생각 없이 읽어 내려갔다. 한 번에 한 알씩, 약의 종류는 세 가지니 총 세 알을 먹어야 하는 셈이다. 먹어야 할 약들을 물과 함께 삼켰다. 범죄자 조직 소탕, 인질 구출 등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스푼 사원들이 겪을 트라우마와 정신적인 건강을 생각해 미리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약이라는데, 이런 일을 실시하다니 서장님답지 않다.